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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송두율 교수 사건

송두율 교수 부부와 함께한 목요일 저녁

by betulo 2011.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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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6월2일 독일 베를린 시내 외곽을 달리던 전철이 한적한 시골역같은 곳에 멈춰 섰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문은 안 열리고 전철이 다시 움직인다. 그때서야 뭐가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독일 지하철에선 문에 달린 단추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 다음 역에서 전철을 반대방향으로 갈아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번엔 제대로 단추를 눌렀다. 단추가 빨간 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며 문이 열렸다.

전철역 바로 옆 주택가로 들어섰다. 초인종을 누른다. 현관문이 열렸다. 3층에 다다르자 반가운 분들이 따뜻하게 안아주며 어서 들어오라고 잡아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를 그렇게 7년만에 다시 만났다. (당시 나는 5월말부터 7월초까지 6주간 9개국을 혼자서 돌아다녀야하는 순회특파원이었다. 독일은 네번째 방문국이었다.-2013.4.15. 추가설명)

두 분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9월이었다. 만났다기 보다는 직접 얼굴을 본게 처음이라고 하는게 정확하겠다. 그 해 9월22일 두 분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1967년 유학 이후 35년만에 어렵게 성사된 귀향이었다. 당시 공항엔 이들을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발디딜틈도 없었다. 쉴새없이 이들을 비추는 조명과 카메라 셔터 불빛에 눈이 부셨다.

처음엔 5년 있다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던 송 교수는 그 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1972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을때 그냥 곧바로 귀국했더라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 국내 어느 대학에서 교수가 돼 지금쯤 명예교수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즈음 두 분은 해외에서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귀향의 꿈을 가슴 한켠에 묻어둬야 했다.

그렇게 35년이 흘렀다. 두 분은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두 아들은 독일인으로서 자라며 부모의 고향에 왜 가지 못하는지 묻기도 했다. 35년만에 돌아온 고국은 이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집요하게 송 교수를 심문하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일부 언론은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국정원·검찰·언론은 핑퐁게임하듯이 그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몰아가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작업을 벌였다. 결국 송 교수는 구속됐다.

귀국부터 구속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송두율 교수 37년만에 고국방문 (03.9.22)
송두율 교수, 37년만에 고국에서 강연
송두율 교수 첫 고국강연(03.10.01) 
송두율 교수에 시대착오적 전향 주장, 우려 커져
"수구언론, 법치주의의 기본원칙조차 훼손"
송두율 교수 관련 검찰제출문건 둘러싸고 시민사회 이견
"'송두율 색깔론' 거론 말라"
"대승적인 관용으로 송 교수 포용하자"    


 법원은 2004년 3월 징역 7년을 선고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다행히 그 해 7월 2심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이 됐고 송 교수 부부는 곧 독일로 돌아갔다. 지난 2일 만났을때 정 여사는 “당시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 몸으로 겨우 독일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결국 대법원은 2008년 독일 국적취득 이전의 방북을 뺀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해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고 이는 그해 8월 확정됐다.

1972년 이후 교편을 잡았고 1982년엔 교수자격까지 취득한 학자를 “알고보니 교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며 기자회견장에선 대놓고 “송 교수님이 아니라 송 선배님께 질문하겠다.”는 뻔뻔한 말을 하던 언론들은 구속 직전까진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양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구속되는 순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체했다. 송 교수가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도 침묵했다. 그들은 언제나 '현안'을 다루느라 바쁘니까.

재판과정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송두율 교수 석방 대책위 결성 (2003.11.14) 
송두율 교수 석방 국제연대운동으로 확산 
송교수 대책위, 정형근 의원 등 3명 고발 (2003.11.28)  
방한 라이너 베리닝 박사 송두율 즉각 석방 촉구 (2003.12.5)

송두율 2차 공판 검찰 대 변호인측 공방 (2003.12.17) 
송두율 교수 결심공판 또 연기 (2004.2.25) 
홍진표가 송두율 교수를 "주사파 대부"로 지목했던 까닭은

내가 만나본 홍진표와 뉴라이트 
"물방울 하나가 바위에 튀는 것을 느낍니다" (2004.4.1)
송두율 7년선고 (2004.3.30) 
정정희 "송 교수 단죄는 반민주 폭거” (2004.4.1)
송두율 사건, 21세기 최대 언론스캔들 (2004.4.30) 
독일 학자 47인 "송 교수 7년 선고에 분개" (2004.5.19)
 
판사님, 판사, 판사새끼 
송두율 교수 2심 결심공판 열려 (2004.6.30) 
‘다섯번째 원숭이’는 무죄 (2004.7.30) 

 

교수 은퇴 이후 더 바빠

 독일로 돌아가고 나서 송 교수는 2009년 가을 정년퇴임했다. 하지만 교수 당시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했다. “한국에선 교수란 자리가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아요. 제 지인들을 봐도 그렇죠. 이 곳 독일에선 나이를 먹을수록 학자로서 더 정열적으로 글을 씁니다. 저 역시 힘이 없어 글을 못쓰는 날이 오기 전에는 계속 글을 쓰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쓰는게 요즘 일과라고 했다. 대략 6시간 정도 집필에 몰두한다. 작업은 주로 조용할 때인 저녁 늦게 하는 편이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게 대여섯 권입니다. 그 가운데 독일어로 쓰는 책이 세 권이죠. 하나는 비엔나에 있는 출판사에서 곧 출간할 예정인데 내가 맡은 부분은 탈고를 거의 했습니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이 지난 100년 동안 겪어온 정치와 사회 역사를 다뤘습니다. 전문서는 아니고 유럽에서 여전히 한국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핵심 문제를 짚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어로 쓰는 마지막 한국 관련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솔직히 더 이상 한국 문제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그래도 내 고향이 한국이니까 쓰게 됐다."고 했다. "두번째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1967년 유학온 뒤 45년 동안 독일에서 겪었던 내 지적편력을 정리하고 고찰하려고 합니다. 현대성(모더니티)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책도 준비중이죠.”

 몇몇 한국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자며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현재 두 가지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한다. 하나는 한국에서 여전히 ‘경계인’의 의미에서 대해서 오해도 많고 궁금증도 많다며 그에 대한 대중서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동의한 뒤 대략 ‘경계인과 세계인’이란 주제로 대학생을 위한 교재 형식으로 구상중이다.

“독일에서 반백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한국어로 글을 다듬는게 말처럼 쉽진 않다.”면서 “정리는 얼추 해놨는데 출간을 언제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또 하나는 살아온 과정을 되짚어보는 자서전을 쓰기로 한 출판사와 약속을 했다.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높은 게 비싼집

 두 분은 지금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수십년이 됐다. 뮌스터대 등에서 교수로 일할 때는 송 교수가 기차로 대학에 가서 며칠 지내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고 한다. 집 근처에 김나지움도 있는 등 교육여건이 좋은데다 집 자체도 마음에 들어서 이사갈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한국과는 정 반대로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이 높은 집이 비싼 집으로 통한다는 얘길 들었다며 아는체를 하자 송 교수는 무심한 듯 자세하게 집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천장 높이는 3.5m”이고 거실 바닥의 목재는 “길이가 8m”이고 “19세기 프로이센 장교들이 살던 집”이었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집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 끝을 다 개방할 수 있다. 손님들을 저녁에 초대할때는 작은 파티장이 될 수 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공기도 맑고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잠을 깬다. 건축양식도 현대 양식으로 넘어오기 직전이라며 ‘희소성’을 강조했다. 자제들을 키우며 수십년을 산 집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 얘기를 듣다가 그가 한국에서 10개월 가까이 겪었던 서울구치소 독방을 떠올렸다. 35년 동안 입식 생활을 한 그에게 한국식 독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건 너무나 힘든 노릇이었다. 그를 위해 변호인단과 주한독일대사관은 책상을 넣어달라고 교도소측에 요청했다.

1990년대 윤금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한국 교도소에 수감됐던 미국 국적자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국의 기준에 준한 감옥에서 인터넷까지 즐기며 감옥생활을 했다지만 당국은 독일 국적자였던 송 교수에 대해서는 선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송 교수가 수감돼 있을 당시 두 번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 여사와 둘째아들을 따라서 갔고, 두번째는 혼자서 갔다왔다. 면회시간은 짧고 가족끼리 할 말이 많은데 끼어드는게 예의가 아니라서 뒤에서 세분이 독일어로 대화하는걸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 여사는 “당시 그게 마음에 걸려서 대책위원회에 얘기해서 면회날짜를 하루 잡아달라고 했다.”고 했다. 사실 송 교수와 처음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건 두번째 면회장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송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건 그 때 이후 베를린이 처음이었다.

구속 이후 언론 관심이 멀어질 때 나는 꾸준히 취재를 계속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법정심리가 있는 날은 고집스레 기자회견이 열렸고 나는 거의 모든 자리를 함께했다. 사실 정 여사가 나를 기억하고 단독인터뷰에도 응해줬던 게 다 그 덕분이었다. 정 여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기자같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송두율 교수 옥바라지 정정희 여사 단독인터뷰(2004.4.1)


거실에서 송두율 교수와 함께. 벽에 걸린 액자는 "깨끗함은 결국 화해와 기쁨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두 분은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손수 음식을 준비했다. 오랜 해외취재일정 동안 한국 음식을 못먹었을까봐 고기쌈을 준비했다. 집에서 직접 기른 채소도 꺼냈다. 참 맛난 저녁이었다. 독일에 처음 왔을때는 김치를 담그고 싶어도 재료가 없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중국이나 인도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비슷한 걸 사다가 김치 대용으로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몇 십년을 지내다보니 이제는 한국요리를 하면 전통적인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한다. 한편으론 옛 맛을 간직하고 있단 뜻이고 다른 한편으론 평균적인 한국인의 입맛도 많이 바뀐 탓이리라. “가위의 양쪽 끝이 벌어지며 서로 멀어지듯이” 두 분이 가슴속에 간직한 한국과 실제 한국의 거리는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 덕에 한국에 와서 상당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초대장을 못받았다”며 지인의 회갑잔치에 갈 엄두를 못내기도 했다.

 정작 두 분이 기대했던 변화는 너무 더뎠다. 두 분은 민주화된 한국에 용기를 얻어 귀국했지만 고국은 그들이 한국을 떠날때도 말많고 탈많았던 바로 그 국가보안법으로 송 교수를 잡아넣었다. 정작 송 교수는 수십년 동안 통일이란 화두를 철학적으로 고찰했지만 고국은 그에게 ‘친북인사’란 딱지를 붙였다.

송두율 교수 “조중동있는 한국사회 희망없다”
송두율 1심 최후진술 "국가보안법은 반통일적 장애물" (2004.3.9)



하버마스나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등 전세계 석학들까지 송 교수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정작 한국에선 송 교수를 아는 사람 중에서도 일부는 짐짓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나마 송 교수 비난에 동참한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해야 할까. 유학 시절 여름이면 두 분한테 찾아와 며칠 자고 갈 정도로 친했던 어떤 유력 정치인조차 언제 그랬냐는듯 모르척했다. 그런 장면 하나 하나가 모두 두 분에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밤 늦게까지 수다를 떨다

 저녁 7시에 초대를 받았는데 저녁을 먹으며, 또 와인을 곁들여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11시나 돼 버렸다. 셋이서 당시 얘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다가 가슴 아팠던 얘기에 먹먹해 했다. 고국에 대한 섭섭함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송 교수는 “한국에 대한 책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왠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많은 얘기 가운데 상당수는 이 글에 담을 수 없다. 예민한 문제들이라서 두 분은 자신들이 한 얘기가 널리 퍼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가슴에 묻어둘 밖에.

 오랫동안 두 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처음 송 교수 책을 읽었던 1995년 이후, 그리고 두 분이 망명하듯 한국을 떠날 당시에도 나는 언제나 이런 날을 꿈꿨다. 그리고 7년만에 소원을 이뤘다. 하지만 벌써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몇 시에 오겠느냐며 약속시간을 정할 때 낮에 가겠다고 할껄. 이제 베를린을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다시 두 분을 뵐 수 있을까.

송 교수가 말하는 '한국 대학 등록금 문제'

 그래도 ‘공식’ 인터뷰를 빌어 소개할 수 있는 얘기는 건졌다. 40년 가까이 교편을 잡은 교육자로서 송 교수는 최근의 한국의 교육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독일의 경우 대학 교육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다. 최근 일부 주에서 등록금을 부과하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한 학기 500유로에 불과하다. 대학생들에게 버스와 지하철을 무료로 해준다거나 하는 등 각종 혜택도 많다. 한국 사립대학들이 한 학기에 800~1000만원 수준의 등록금을 받는다는 건 상대적인 국민소득을 감안할 때 엄청난 부담이다. 이는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값 등록금’ 논쟁에 대해서는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이 많고 적고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면서 “대학 졸업자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등록금을 반의 반으로 줄이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고학력 실업문제, 즉 교육과 고용 정책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장기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이름으로 영어수업을 의무화하는 곳이 늘고 있다. 심지어 영어수업 가능자를 교수 임용 조건으로 내거는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미쳤다”며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하기만 하면 미국에서 빌빌대던 사람도 한국에선 교수로 대접받는다. 이래가지고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회가 어떻게 발전한단 말인가.” 그는 ‘학문의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꼬집었다.


 “영어를 잘 구사해야 한국 학문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한다거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는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문제는 영어를 잘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채우느냐다. 언어는 수단이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건 말 그대로 ‘주객전도’다.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전문인력을 적극 육성해야 하는건 맞지만 5000만 국민 모두가 영어 도사가 될 필요가 있겠나. 자국어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는 세계화는 없다.”


송 교수의 비리(?)를 폭로합니다

 수다를 떨다가 정 여사한테서 송 교수의 엄청난 비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정 여사가 밝히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되겠다.

유학 뒤 정 여사는 사서로서 독일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송 교수가 논문 준비와 유신반대운동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데다 아이들까지 생기자 도저히 직장을 계속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대우가 좋은 자리인 데다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에 고민이 정말 많았단다.

 “어렵게 사표를 내셨겠네요.”

 “아녜요. 나는 도저히 사표를 못 쓰겠더라고요.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고 있는데 저 양반이 내 사표를 대신 썼어요.”

 정 여사는 이어 “그렇게 뒷바라지해서 교수 시켰는데. 한국 가서는 또 1년 가까이 옥바라지하다가 내가 폭삭 다 늙어 버렸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엄청난 반응이 나오겠는데요. 이제 집안일은 왠만한건 다 떠넘기셔도 되겠네요.”하며 맞장구를 치자 정 여사는 그 말이 맞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송 교수를 흘겨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식은 당신이 좀 가져오시죠.”

송 교수, 멋적게 웃더니 말없이 부엌으로 가서는 예쁜 유리컵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왔다. 우리는 후식을 먹으며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 한가운데 운치있는 자리잡은 원목책상을 보고 송 교수에게 “멋진 서재네요. 저기서 글을 쓰시면 글이 더 잘 써지겠습니다.”라고 하자 송 교수가 “아니 이건 저 사람꺼고, 나는 저 옆방에.”했던 게 떠올랐다.

송 교수가 구치소에 있을 당시 바짝 바짝 말라가던 정 여사를 생각하면 송 교수는 앞으로도 안방마님을 잘 봉양(?)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보니 거실 한켠 책꽂이에 멋드러진 붓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던게 기억난다. "여성이 세상을 바꾼다."
 

#뱀다리(蛇足) 

정 여사는 얼마 전 발코니에 오이를 심었다. 원래는 꽃만 길렀는데 최근 새로 생긴 취미생활이다. 까맣게 윤기있는 독일 흙은 토질이 워낙 좋아 따로 거름을 안해도 식물이 잘 자란다. 올 여름에는 두 분이 하루 종일 먹고도 남을 만큼 오이가 열릴 것이다. 하늘 높이 줄기를 뻗으며 풍성하게 열릴 오이처럼 두 분에게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길 빈다. 그리고 언젠가, 두 분을 서울에 있는 우리집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두번째 뱀다리((蛇足)
(6월13일 저녁 추가 작성)


한국을 떠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인사동에 갔다. 송 교수 댁 초대를 받은 마당에 빈 손으로 가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아내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것 저것 한참을 재고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우리는 두 분을 위한 수저 세트로 결정했다. 그리고 정 여사를 위해서는 예쁘게 생긴 비단 부채를, 송 교수를 위해서는 명함케이스를 골랐다. 송 교수는 나중에 별도로 "특별한 감사"를 아내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한다면, 적어도 명함케이스는 내 아이디어였다. 


송두율 교수 관련 옛 기록들

인권을 기준으로 본 '부르카 금지'
송두율 교수 북한 연구서 28일 독일서 출간
송두율교수 안중근평화상 수상 (2004.3.18)
송두율 교수 본사에 옥중서한 보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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