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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1 17:28

송두율교수 안중근평화상 수상 (2004.3.18)

송두율교수 안중근평화상 수상
“부자유의 고난 삶 되풀이” 선정 이유
2004/3/18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가 제3회 안중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안중근 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는 “송 교수의 고난이 민족의 고난의 현장을 상징하는 한 지표로서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과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정신을 체현하고 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경계인’ 체험의 유산 속에서 역사는 생동한다”는 제목의 선정이유서에서 “송 교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그를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선정이유서는 또 “송 교수가 다원적이고 대화합의 시대에 폐쇄적이고 분열적인 사고와 법규로 재단당하여 과거 정약용이 겪었던 것과 같은 부자유의 고난을 되살고 있다”며 “송 교수는 정약용과 그의 친구들의 21세기 동지”라고 규정했다.

 

이와 함께 선정이유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한 횃불이자 민족의 갈림을 잇는 데 이바지할 ‘진정한 접점’으로서 송두율 선생이 우리의 역사를 자유롭게 견인할 그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끝을 맺었다.

 

안중근 기념사업회가 2001년부터 시상하고 있는 안중근 평화상은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세계의 참평화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고자 제정한 상이다. 안중근 평화상 시상식은 26일 낮 2시 명동성당 별관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94주년 추모행사와 같이 할 예정이다.

 

한편 송 교수는 최근 독감과 불면증 등으로 식욕을 잃어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송 교수 부인 정정희씨는 “낮에도 장갑을 끼어야 할 정도로 외풍이 심해 독감에 걸렸다”며 “특히 남편이 19일 모친 기일을 구치소에서 보내는 것 때문에 매우 울적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남편이 구속됐을 때 아들들이 너무 충격을 받아 보름 가까이 진정제를 먹어야 했다”며 “이번에 중형이 선고된다면 아들들이 더 큰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sechenkhan@ngotimes.net


<다음은 안중근평화상 수상 이유서이다>

 

수상자를 선정하면서: “경계인” 체험의 유산 속에서 역사는 생동한다


송두율 교수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가 스스로를 이렇게 명명하게 된 정황은 지극히 문화-사상적이다. 1994년 10월에 그가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한국학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역사와 정치, 사회, 경제 분야를 강의할 때였다. 독일인 동료들이 서구 철학과 한국학을 동시에 연구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그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너의 머리 속에는 칸트나 헤겔과 한국이 공존하는데 힘든 노릇이 아니냐?” 이에 대해서 송교수는 이렇게 답하였다: “어려워도 할 수 없지 않느냐, 그것이 한국과 유럽 사이의 경계인의 숙명이 아니냐”(송두율, “연보/ 처음 그려보는 자화상,” 역사는 끝났는가, 당대, 1995, 377-8).

 

  이를테면 “경계인”이라는 표현은 단지 “남”과 “북,” 한민족으로서 갈라진 두 사회 체제를 이어 줄 접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한민족의 매개인”이라는 자기 인식을 표현한 것이기 이전에, 동아시아의 한 나라 한국과 유럽의 한 나라 독일의 문화와 문화, 사상과 사상을 매개할 존재로서 그가 처한 근본 처지를 설명하는 언어로 쓰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문화와 사상의 매개 체험의 토대 위에서 한 민족의 매개 사명은 그만큼 더 절박하고 간절한 과제로 체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계인 체험이 송교수를 매도하는 정치인들에 의하여 전통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탈자요 이중 신원을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득을 노리는 회색분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왜곡되고 있다. 송교수 자신이 이런 왜곡된 이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면 “경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경계인 체험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창조적인 업적들이 바로 “경계인”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송두율 교수 사건은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당대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기가 원하는 경계 밖으로 내몰려 “변방”으로 쫓겨난 당대 최고의 “경계인,” 다산 정약용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학문의 진정한 개방과 민족의 생존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지켜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송두율 선생과 다산 정약용의 “경계인” 체험은 포기되거나 떨쳐버려야 할 무엇이 아니라 도리어 제대로 연구되고 발전적으로 승화되어야 할 무엇이다.

 

1797년 음력 6월 21일, 정약용은 그가 모시던 임금 정조에게 자기의 사직을 허락해 달라는 소를 올린다. 정약용은 그때 왕의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핵심 직책 가운데 하나인 정3품 동부승지의 직에 있었다. 이 소에서 그는 젊어서 서학의 윤리적 차원과 수리, 천문, 지리, 농정 등의 지식에 매혹되어 서학을 사랑하고 사모한 적이 있었음을 밝힌다(『국역 다산시문집』 4, 솔출판사, 1996, 183-4). 그러나 천주교 지도부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하늘을 거역하고 [부모와 성현의] 귀신을 경멸하게” 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저버릴 것을 요구하는 이 교를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기가 과거에 서학에 빠졌다는 이유로 자기를 비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에게 직무를 허락한 임금까지 비난하게 만드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기는 더 이상 자기의 직에 머물지 않고자 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189).

 

이에 대해서 정조는 이렇게 답하였다: “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착한 마음의 싹이 마치 봄바람에 만물이 자라는 것같다. 종이에 가득히 열거한 말은 듣는 이를 감동시킬 만하다. 너는 사양치 말고 직책을 수행하라”(같은 책, 189: 조선왕조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138 참조).

 

이 일이 있고 나서 사흘이 지난 6월 24일, 당시 우의정 이병모가 나섰다. 정약용의 상소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운을 뗀 이병모는 정조와 정약용의 사이를 베어버리고자 비판의 칼을 휘두른다. “사학(邪學)은 본래 이단으로만 논할 수는 없”고, 이른바 “구적(寇賊)과 간구(奸究)의 부류”로서 “베어 없애 남김이 없도록 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조선왕조실록 천주교사 자료 모음, 138-9). 그러므로 정약용의 직책을 박탈하는 법을 시행해야 옳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병모에게 먼저 이렇게 답하였다: “그(정약용)는 바야흐로 움츠려 있던 벌레가 우레소리를 듣고 절명한 듯하다가 다시 소생한 것과 같으니, 그 한참 자라는 가지를 꺾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에서도 하필이면 이와 같이 해야 하겠는가?”(같은 책, 139). 정조는 이 자리에서 “사학의 폐단은 ... 바로잡도록” 할 것이나, “형법으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뒤에는 정조의 “천도에 부합하는 보민(保民)”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전해(1796년) 초겨울 무렵 그 자신이 우레소리 앞에서 “하늘을 대하는 도리”를 뇌이며 움츠러드는 것을 겪었던 심경을 피력한 적이 있다: “어제 내가 으르릉거리는 우레 소리를 듣고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일로 인하여 말을 구하여 훌륭하고 옳은 논의를 듣게 된다면 다행이겠다’ 하였으니,” 그가 염려하는 것은 “진실된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는 도리”를 어기는 일이라는 것이다(134).

 

여기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정조의 저 관용 정신이다. 이런 관용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기의 도에 대한 신뢰와 긍지에서 비롯된다. 자기를 바로 세울 때, 밖에서 밀려오는 그릇된 가르침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당대에 막 들어온 서학을 사교로 비판하며 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빗나간 확신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저 비판자들에게 그대들의 내수(內修)가 정말 문제 없는가를 질문하는 차원을 발생시키고 있기도 하다. 실로 역사는 이 면에서 정조가 옳았음을 보여 준다. 건강한 유교 실천인들은 민중과 함께 살았고 또 그럴 수 있는 토대를 열었다. 그러나 당대에 탄압할 권력에 참여한 허약한, 자신들은 확고하고 정의롭다고 여겼을지 모르나, 유교 추종자들은 역사와 민중 앞에서 사회악을 범했던 존재들로 확인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서학과 유학을 동시에 가슴에 품은 “경계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선진 문화 현상의 주도자 가운데 일인이었다. 그런 그가 탄압 세력 앞에서 외면으로는 제사 문제를 내세워서 “배교”를 공언하였다. 자신의 “경계인” 위치를 떨쳐버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로 “유배지”에서도, 그리고 더는 관료로서 민중을 돌볼 수 없는 몰락한 양반의 처지에서도 내내 “천주학”을 통하여 전달받았던 “하느님의 정의로운 다스림”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인물이었다. 정조가 인간적인 한계로 가톨릭 신앙의 진정한 의의를 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그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한 한 시대의 아들로 살았던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대“경계인” 정약용에게 정조의 저 빗나간 확신은 오히려 반드시 관철되었어야만 할 하늘의 생명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이 역설은 실로 하느님의 정의의 다스림이 우리네 삶의 대원리요 판단의 척도이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생명의 현실이다.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에 닿은 사람이, “천도”를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의 도리”를 가슴에 품어 “보민”을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보우(保佑)”의 신비이다. 바로 이것이 하늘의 사람과 함께 하는 “천지총(天之寵)”을, 다산이 유배를 살면서도 노래하고 이 시대의 경계인 송두율 선생이 기원할 “하늘의 은총”의 깊이를 말해 준다(다산 시문집 7, 100; 같은 책, 144도 참조). 이 사랑이야말로 정조의 빗나간 확신조차도 오히려 천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쓰일 가능성을 열어 주는 그 결정적인 에너지였던 것이다. 그것조차도 “보민의 정치”를 통해서는 도리어 당대의 생명의 길, 하느님의 생명의 질서를 설득할 기초로 작용하였으니, 그것이야말로 민중과 민중을 사랑하는 이들의 “천도” 구실을 했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 아무리 역사가 복잡해 보여도, 그것이 순수, 사랑의 돌봄에서 만날 때, 단순, 지순해지는 것이다. 정조의 빗나간 확신에 축복 있으라. 그의 빗나간 확신을 먹고 살아남은 조선 후기 최대의 “경계인” 정약용에게 하느님의 위로 있으라. 그와 함께 민족의 생명의 길을 연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하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돌보심이 영원히 함께하시라.

 

이 시대에도 천도에 부합하는 보민을 살아야 할 입장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반역사, 반민중의 악행자의 역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이병모와 같은 존재들이 있다. 천도를 거스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이런 부류들에 의하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민중과 민중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조와 정약용, 당신들이 살림의 정신으로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미 누렸고 지금은 하느님의 살리는 섭리 안에서 하느님의 친구로서 누리고 있을 하느님의 정의와 위로를 부디 이 시대, 당신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빈다.

 

당신들이 살았던 이땅에는 송두율 선생이 어느덧 반세기가 훌쩍 넘은 분단의 아픔을 온몸 온마음으로 품어안은 채 문화와 사상의 경계들을 넘나든 이 시대의 “경계인”으로서 우리를 찾아와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지금 다원적이고 대화합의 때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폐쇄적이고 분열적인 사고와 법규로 재단당하여 과거 하느님의 사람 정약용이 겪었던 것과 같은 부자유의 신고(辛苦)를 되살고 있다.

 

오늘 우리는, 옛날 정약용과 그의 친구들이 저 박해자들의 탄압과 유배형으로 고난을 겪었을 때를 기억하면서, 당신들의 21세기 동지, 송두율 선생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그를 제3회 안중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상은 민족의 진정한 독립과 세계의 참평화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고자 제정한 것이다. 송두율 선생의 고난이 민족의 고난의 현장을 상징하는 한 지표로서,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과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 정신을 체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시대의 성숙에 힘입어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한 횃불이자 민족의 갈림을 잇는 데 기여할 한 “진정한 접점”으로서 송두율 선생이 우리의 역사를 자유롭게 견인할 그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04년 3월 18일 오전 10시 48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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