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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조봉암 선생 장녀가 말하는 '아버지'

by betulo 2007.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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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선생 장녀 인터뷰 지시를 받은게 오후 3시. 주소와 연락처를 받고 일단 차를 타고 주소지로 가면서 전화를 아무리 해도 전화를 안 받았다. 주소로 받은 동네로 가서 부동산 중개업소 가소 위치를 대략 파악해 그쪽으로 갔다. 아뿔싸. 산 중턱부턴 차가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산길을 올라 주소지를 찾아 찾아 집 앞에 서니 이번엔 무섭게 생긴 개 한마리가 대문 너머에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으르렁거린다.

초인종을 아무리 누르고 전화를 계속 걸어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인터뷰는 글렀구나 싶어 전화로 보고를 하자 마자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고개를 내민다.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에게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결국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개가 무서워서 대문 잠그고 집 앞 계단에서 쭈그리고 시작한 인터뷰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는라 훌쩍 30분을 넘겼다. 할머니는 얘기 중간에 바람이 차다며 외투까지 집에서 가져와서 아버지 얘기를 들려주셨다.

기사에는 쓰지 못했지만 조봉암 선생과 관련한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마감시간이 짧은 게 아쉬웠다. 인터뷰 끝내자마자 차로 돌아와서 종로경찰서 가서 20분만에 인터뷰 기사를 출고했다. 역시 '초치기는 내 힘.'

기사에선 말하지 못했던 조봉암 선생.

# 조봉암 선생은 해방직후 여러 정치지도자 가운데 여운형 선생과 가장 친했다고 한다. 둘 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조봉암 선생은 1946년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을 공개비판하는 편지를 내고 공산당과 결별했다. 할머니 말로는 미군들이 아버지 사무실에 들이닥쳐 서류를 몽땅 압수해갔다고 한다. 압수당한 서류 중에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 '초고'가 있었고 미군정은 그 '초고'에 '윤색'을 보태서 언론에 공개해 버렸다. 애초 그 편지는 공개적으로 쓸 의사가 전혀 없었다.

#할머니는 박헌영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무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공개비판 편지 받고 박헌영이 꽤 열받았을 거라면서.

#조봉암 선생은 한민당 쪽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김구 다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김구에 대해서는 "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한다.

#조봉암 부인, 그러니까 조호정 할머니 친어머니가 여장부 성격이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보기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강한 성격이었다고.

# 전두환 때부터 아버지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탄원서를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영삼 때는 내심 기대도 많았다고. 김영삼은 해방 직후 장택상 비서를 했는데 장택상은 조봉암 선생과 친한사이였다고 한다. 할머니 말로는 조봉암 선생과 김영삼은 안면이 있었을 거라고 한다.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네요. 망우리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가서 좋은 소식을 알려드려야겠습니다.”

1959년 사형당했던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진실규명결정과 사과 권고가 나오자 조봉암암의 장녀 조호정(80) 할머니는 “지금도 얼떨떨하다.”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48년 동안 가슴에 묻어뒀던 아버지 얘기를 할 때는 당시를 생각하며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48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들

“제가 32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서 사촌오빠 부부와 제가 옥바라지를 해야 했지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경찰들이 집에 상주하면서 남편(영화감독 이봉래)을 감시하곤 했지요.”

조봉암은 1남 3녀를 두었지만 조 할머니의 동생들은 해방 이후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당시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슬하에 딸 하나를 둔 조 할머니는 40년 넘게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딸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조 할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냉철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이 많고 자상한 분이었다. “영화를 같이 보면 눈물을 제일 많이 흘리는 사람이 아버지였어요. 영화를 좋아하셔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영화를 많이 봤지요. 하루는 남편 저녁을 차려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거예요. 안된다고 했더니 많이 서운해 하시더라구요.”

조봉암은 1952년과 1956년 대선에 연거푸 출마했다. 1956년 대선에서는 200만표 이상을 득표해 이승만 정권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조 할머니는 “부산에서 지프차를 타고 선거 유세를 다니는 걸 따라 다닌 적이 있다.”면서 “테러를 당할까봐 겁도 났지만 사람들이 환영해주는 걸 보니 보람도 느꼈다.”고 회상했다. 

1956년 대선에서 평화통일 공약을 내걸었을 때는 가까운 사람들도 말렸다고 한다.

“무서우니까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겁을 냈을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이승만 박사 무서워서 대적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주위 사람들을 설득했지요.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자식된 입장에서 조용히 가족들끼리 오손도손 살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요.”

“아버지는 경찰에 잡혀간 게 아니라 자진 출두”

48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조 할머니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던 게 어제같은데 이제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이다. “세월의 무게를 느낍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구나 싶구요. 선구자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도 들지요.”

조 할머니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세상에 잘못 알려진 게 있다면서 꼭 바로잡고 싶은게 있다.”고 했다. “1956년 1월에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아버지는 밖에 계셨어요. 연락을 받고는 자진해서 출두했습니다. 결코 잡혀간 게 아니었어요.”

기사일자 : 2007-09-29    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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