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포스터. 군대의 실상을 꽤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노력한 작품이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친구일 수 없었다."는 말이 많이 와 닿았다. 물론 이 기사와 특별한 관련은 없다. <출처=구글 검색>
고모(21)씨는 일반인들이 10초면 오를 계단도 1분이 넘게 걸린다. 천천히 10분만 걸어도 온몸이 쑤신다고 말한다. 수시로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곤욕이다.
지난해 10월 의경으로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 훈련을 받다가 생긴 치질 때문에 수술을 받은 후 1년간 계속 이런 상태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게 되면서 각급 군병원에서 6개월 가까이 보내는 등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해 그의 계급은 입대 1년이 되도록 ‘이경’이다.
●1년간 받은 ‘원인 모를’ 고통
고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무도 원인을 모른다는 점이다. 고씨와 그의 부모는 수술 당시 마취 과정에서 생긴 잘못이 원인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근전도․신경전도 등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온다. 당연히 의가사제대도 할 수가 없다. 사립대학 병원 두 곳에서 정밀 진단을 받았지만 거기서도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씨를 담당했던 송모 군의관은 “솔직히 나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다리에 힘이 떨어지는 것은 근육이나 신경에 이상이 있어야 하지만 여러 차례 검사결과 아무런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검사 결과 이상이 없으니 전역이 안되는 것”이라며 “전역을 시켜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고 답답해 했다.
지난 2월 고씨를 진찰했던 Y대학 병원의 김모 교수는 진단서에서 “정신적 원인에 의해 신체 증상이 나타나는 ‘신체형 장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신체형 장애란 내적인 불만이나 갈등이 일상적인 정신 방어작용으로 해소 되지 않을 때, 누적된 정신적 갈등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군대에서 환자는 죄인”
김 교수는 진단서에서 “환자의 보행장애는 지속적인 격려와 심리적 상담을 통해 호전 가능하다고 추정…”이라고 썼다. 하지만 고씨는 군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지어 “상급 군병원에서는 제대로 된 원인 설명도 해주지 않고 치료도 안 해주면서 ‘꾀병만 부린다. 아프지도 않는데 왜 똥 싼 사람처럼 걷느냐.’는 인신모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한 전직 육군 영관급 장교는 “병원에선 환자가 중심이 돼야 하는데도 군대에선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조직문화 때문에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면서 “누구나 아플 수 있다는 상식을 인정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환자가 죄인이 돼 버리는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의료소비자시민연대 소비자상담센터 이인재 소장(변호사)은 “신체형 장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더라도 국가에서 실시하는 징집 신체검사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 입대한 청년이 수술 이후 질환을 호소하는데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결국 국가가 장병관리를 소홀히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는 “다만 의료진의 과실이라고 하기엔 인과관계가 약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의병제대도 쉽지 않아
문제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고씨가 의경 신분으로 국군 소속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데서 나온다. 송 군의관은 고씨가 지난 5월 경찰학교로 배치받을 당시 “경찰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지만 고씨는 경찰병원에서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했다.
고씨는 “이제는 의병제대라도 해서 집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기동대에선 의병제대를 권하지만 그러려면 육군 병원에서 받은 신체검사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는 현재 서울시경찰청 기동대 소속이지만 수술은 국방부 소속일 당시 받았기 때문이다.
수도통합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역에 필요한 5급을 받지 못했다. 정상적인 복무도 못하면서 의가사제대도 못하는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가 돼 버린 셈이다. 그는 “‘강제전역’도 경찰이 아니라 군 소속일 당시 생긴 질환이라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고씨는 현재 병가를 받아 집에 머물며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정밀진단과 재활치료 비용만 500만원이 넘게 들었다.”면서 “한번에 10만원이 드는 재활치료비가 부담스러워 헬스클럽에서 혼자서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의 책임감 시험하는 리트머스지
현재로서는 고씨와 그의 가족이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감내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김 교수의 지적처럼 “시험을 앞둔 부담 때문에 시험 직전에 배가 아픈 것처럼, 정신과적으로 긴장이 고조되면서 본인의 정신적 긴장이 육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건 고씨의 질환이 병역의무를 수행하다 발생했다는 것이고 그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씨의 사례는 한 청년을 징집한 국가의 책임감을 시험하는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진퇴양난에 빠진 고씨에게 해결책은 없을까. 김태현 경실련 사회정책국장은 “의료사고피해구제법 제정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피해당사자들이 의료진 과실을 입증해야 했던 현행 제도에서 의료진이 자신의 무과실을 증명해야 하도록 하는 ‘입증책임전환’이 핵심”이라면서 “의료진이 자신의 무과실을 입증하면 배상책임도 없기 때문에 피해를 주장하는 쪽과 의료진의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열린다.”고 지적했다.
2007.10.19일자 8면
로스쿨, 통계를 코미디로 만들어버린 교육부 (0) | 2007.10.24 |
---|---|
반값아파트 실패는 분양가 거품 때문 (0) | 2007.10.23 |
"국제사회는 버마 문제에 관심 많은 '척'만 한다" (0) | 2007.10.01 |
조봉암 선생 장녀가 말하는 '아버지' (0) | 2007.09.30 |
이승만이 일으킨 정치탄압, 진보당 사건 (0) | 2007.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