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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일으킨 정치탄압, 진보당 사건

취재뒷얘기

by betulo 2007. 9. 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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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을 아십니까. 한때 박헌영과 쌍벽을 이루던 공산당 지도자였고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운 진보당을 창당했던 정치지도자. 온갖 부정이 판치던 대통령선거에서 200만표 이상을 득표해 독재자 이승만을 긴장시켰던 사람. 사법기관이 얼마나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가를 반면교사로 일깨워준 사법살인 희생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봉암과 진보당 사건을 진실규명했습니다. 늦었지만 다행스런 일입니다.

조봉암을 처음 접한 건 허영만이 그린 만화 <한강>이었습니다. 안기부 돈받고 시작한건데 너무 잘 그려서 안기부 의도대로 많은 '꿘'들의 애독서가 됐던 바로 그 만화지요. <한강>에 보면 조봉암의 모습을 꽤 실감나게 표현했지요.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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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7일 ‘진보당 조봉암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권이 저질렀던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에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18일 제54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이승만 정권은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한 조봉암을 제거하고 그가 이끄는 진보당이 1958년 총선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려 했다.”고 사건의 배경을 규정했다.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적 공약으로 200여만표 이상을 득표했던 정치인으로 같은 해 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1958년 정부는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해 버렸고 조봉암은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 등으로 구속돼 1959년 사형 당했다.

진실화해위는 초동수사를 맡았던 특무대에 대해서는 “민간인에 대해 수사권이 없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절차적 불법성이 존재한다.”면서 “검찰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공소 사실도 특정하지 못한 채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에 대해 국가변란 혐의로 기소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법부에 대해서도 “서울고법과 대법원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백만을 근거로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라는 책무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이같은 진실규명 결정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국가는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어 “조봉암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을 하다 복역했음에도 사형판결로 인해 독립유공자 인정을 못받았다.”면서 “국가는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권고를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에 대해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80)씨는 “그 동안 끔찍한 기억도 많고 힘이 많이 들었는데 48년만에 누명을 벗게 돼 기쁘고 고맙다.”고 말했다.

(2007년 9월27일 쓴 기사입니다.)

 조봉암(1898~1959) 약력

강화에서 태어났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경성YMCA중학을 졸업하고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일본 쥬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를 수료하였다.

모스크바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조선공산당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일파인 화요회의 회원이었다.

해방 후 공산주의활동을 벌이다가 1946년,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당시 그의 지지율은 23.8%였다.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평화통일’을 공약으로 내걸어 200만표 이상을 득표해 이승만 정권을 놀라게 했다.

1956년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였고, 1959년 7월 31일 국가보안법 위반(간첩죄)으로 사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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