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에서 태어났다. 강화공립보통학교와 경성YMCA중학을 졸업하고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일본 쥬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를 수료하였다.
모스크바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조선공산당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일파인 화요회의 회원이었다.
해방 후 공산주의활동을 벌이다가 1946년,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선거에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당시 그의 지지율은 23.8%였다.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평화통일’을 공약으로 내걸어 200만표 이상을 득표해 이승만 정권을 놀라게 했다.
1956년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였고, 1959년 7월 31일 국가보안법 위반(간첩죄)으로 사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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