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8월 8일 ‘2013 세법개정안’을 발표한 뒤 거센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대다수 시민들이 ‘진보’나 ‘보수’라는 정치적 정체성에 상관없이 오랜만에 ‘국민대통합’을 이뤄 한 목소리로 정부를 비판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지금껏 세금 폭탄과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운다)로 한껏 재미를 봤던 현 여권은 부메랑을 제대로 맞았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12일 정부 세법개정안의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저작권’을 갖고 있던 ‘세금 폭탄’을 외치고 있다.
내 의견을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 대부분 정부 비판에 동참해주길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세법개정안의 당초 취지를 지지한다. 이럴 때일수록 언론이 세법개정안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답했다. 물론, 썩 공감을 얻진 못했다. 정상회담 관련 기록물 유출이나 국정원 선거개입 사태에선 정부를 옹호하던 분들이 세법개정안에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나는 정반대다. 이번 만은, 정부 입장을 옹호했다. 여러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세법개정안은 ‘보편복지를 위한 보편증세’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원점 재검토’라는 박 대통령 발표에 더 불만이 많다.
내가 내는 세금은, 아마도 이번 세법개정안 덕분에, 어느 정도 늘어날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나는 ‘3대 비급여를 포함한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과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지급’ 그리고 ‘영유아보육 및 유아교육 완전 국가책임제’ 같은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지지한다. 그 공약들이 후퇴하는 데 분노한다. 그 공약들뿐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무상급식과 무상보육, 무상의료를 하려면 지금보다 세금을 더 많이, 그것도 훨씬 더 많이 내야 한다.
아마도 심리적 마지노선은 ‘왜 부자들은 놔두고 월급쟁이 유리지갑만 뜯어가느냐’일 것이다. 물론 ‘더 많은 소득에 더 많은 세금’이라는 누진세 원칙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정부의 세법개정안은 부족하나마 누진세 원칙을 구현하고 있다. 종교인 과세나 공무원 직급보조비 과세 조치 등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성과도 포함돼 있다. 비상장 주식 양도차익 과세 같은 개혁이 포함되지 않은 건 아쉽지만, 일부 부족을 이유로 전부 반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를 살펴봐도 복지국가는 부자와 서민이 전쟁을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화해와 양보를 통해 이뤄졌다.
물론 최상위 소득계층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그게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정의에 부합한다. 아울러 최상위 소득계층이 주요 수혜자가 되는 각종 세금감면 혜택도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세법개정안이 부자들 좋은 일만 시키는 ‘악법’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급여소득 상위 30% 이내에 드는 연소득 3,450만 원~7,000만 원 구간에게 연평균 16만원(월 1.3만원) 가량 세부담이 늘어나는 정도다. 이걸 갖고 ‘세금폭탄’이라고 하는건 자신을 ‘어느 나라 정당’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자폭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 의원 박원석이 페이스북에 “참여정부 시절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합세해 발명한 ‘세금폭탄’론은 심지어 종부세를 단한푼도 내지않는 사람들까지 조세저항의 대열에 묶어세워 결국 종부세를 무력화시켰다”면서 “실체를 과장하고 미래를 스스로 결박지우는 ‘진영논리’로는 결코 앞으로 나갈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백번 맞는 말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장하준도 8월9일 한국미래학회 주최 강연에서 비슷한 취지로 발언했다. 대략 이런 얘기였다.
“유럽 복지국가를 보면 간접세 부담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는 부가세가 10%인데 유럽 국가들은 보통 17~18%에서 20%까지 한다. 덴마크는 부가세가 22.5%다. 고소득층 소득세만 더 걷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더 내는 것이다. 세금에 대한 개념을 바꿔야 한다.
많은 분들이 세금은 정부가 거둬 어디다 태워버리는 돈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세금은 내 연금이고 의료보험이고 학교다. 없어지는 돈이 아니다. 흔히 세금은 낮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세금이 낮으면 공공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그것 때문에 경제가 더 안된다. 가령 자메이카는 최고 소득세율이 5%이고, 알바니아는 법인세 최고세율이 10%인데 왜 기업들이 그 나라로 안갈까. 세금은 적은 대신 공공서비스가 엉망이기 때문이다.”
누진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누진세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세금을 통한 양극화 해소보다는 재정지출을 통한 양극화해소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누진세 원칙을 세계에서 가장 잘 구현하는 나라는 스웨덴이 아니라 미국이다. 하지만 미국은 스웨덴보다 훨씬 더 빈부격차가 심각하다. 누진세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세입이고, 있는 예산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복지국가는 부자들과 서민들이 전쟁해서 이루는게 아니라 화해를 통해 만든 것이다.
물론 내 세금을 4대강사업(이라 쓰고 대운하라고 읽는다)을 위한 보(라고 쓰고 댐 혹은 갑문이라 읽는다)를 짓는데 쓰거나, 그렇잖아도 공급과잉은 고속도로 건설하는데 쓰는건 누구보다도 반대다. 예산낭비를 지적하는 비판의식은 우리 공동체를 위한 더 좋은 예산운용이라는 고민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발적으로 증세에 동의해주는 대신, 정부를 향해 이렇게 요구하는 건 어떨까.
‘우리는 영리병원이 아니라 공공의료, 고속도로가 아니라 사회안전망, 무기구매보다 평화에 투자하는 국가를 원한다.’
보편복지를 지지한다면 이번 세법개정안을 지지해야 한다. 국가와 공동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보수’라면 증세를 요구해야 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난 '예산호텔' 모습. 호텔 간판을 보고 '가렴주구'나 '보도블럭 파헤치기'를 떠올리지 말고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이 글은 8월13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칼럼을 바탕으로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슬로우뉴스(slownews.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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