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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김흥주씨

by betulo 2007.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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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차별 넘기 위한 과정”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김흥주씨
노사체결 ‘확약서’ 실천과 해고자 복직이 관건
2005/11/14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농성에 참여했던 61명 가운데 11명이 구속됐습니다.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석방되도록 해야지요. 노사가 체결한 확약서를 이행하는 운동도 중요하구요. 무엇보다도 해고자들이 복직돼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조합원들이 동지애로 똘똘 뭉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지난 9일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임시 사무실에서 만난 조합원 김흥주씨는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고 점거농성을 했다”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싸워야 할 일이 많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김흥주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시민의신문 

김흥주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김씨는 노사가 체결한 ‘확약서’에 대해 “많이 아쉽다”고 털어놓는다. “원직복직 기한을 분명하게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민형사상 문제를 최소화하도록 건의한다’는 것도 너무 모호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점거농성을 시작한 건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대하이스코가 대화에 나서게 만들었고 노조활동을 인정한다는 약속도 받아냈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라며 “확약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크게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씨가 들려주는 비정규직의 현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은 똑같이 하는데 정규직은 4조3교대로 일하면서 한달에 7~8일을 쉬지만 비정규직은 한달에 두 번만 쉴 수 있다. 임금도 정규직의 절반 밖에 안된다. 기본급 70여만원에 수당 더해서 그가 받은 돈은 110만원에 불과했다. 원청과 하청업체라고 하지만 실상 작업지시는 원청에서 한다.

특히 가장 충격적인 증언은 “위장폐업” 부분이었다. “7월 17일 밤에 출근해 18일 아침 6시까지 일했습니다. 유난히 더워서 옷을 짜면 물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교대시간이 됐는데도 교대조가 안보이더라구요. 알아보니 ‘비조합원 6명만 출근하고 노조원은 출근하지 말라’고 차장이 반장에게 전화했다고 하더라구요. 집에 돌아와 자려고 하는데 ‘주 금산은 경영상의 이유로 폐업을 공고함’이라는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날 바로 ‘금산’ 대신 ‘지산’이라는 간판이 걸리고 새로운 회사가 들어섰습니다. 다른 하청업체인 유성TNS 소장이 ‘지산’ 사장으로 취임했어요.”

7월 19일에 동료들과 함께 회사 정문에 갔던 김씨는 못보던 사람 12명이 어디선가 지급받은 깨끗한 작업도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면접보러 왔느냐’고 물어보니까 모두들 ‘오늘 출근하라고 해서 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말 듣는 우리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18일 하루만 기계 멈추고 19일부터는 기계를 다시 돌렸습니다.” 7월 29일 ‘한일’, 8월 11일 ‘우성산업’도 같은 방식으로 폐업했다.

원래 ‘금산’은 직원이 50명 가운데 34명이 노조원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반장은 비조합원들에게만 전화해서 19일 밤에 이력서를 가지고 출근하라고 했고 16명이 ‘지산’에 복직했다. “밤 10시에 면접보는 곳은 이곳밖에 없을 겁니다.” 노조원 34명 가운데 노조를 탈퇴하고 복직한 2명을 뺀 32명은 “위장폐업에 따른 해고”를 당했다. ‘지산’은 12명을 새로 채용한 이후에도 신입직원을 계속 뽑았다. ‘경영상의 이유’가 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김씨는 특히 “원청과 하청은 라인이 이어져 있어 하청에서 폐업을 하면서 기계를 멈춰 버리면 원청도 일을 못하게 된다”며 “하청 폐업이 원청과 사전교감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3년 동안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김씨는 자신이 “얼마나 차별받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고 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비정규직 지회에 가입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조원이라는 것 자체가 김씨에게 많은 고난을 강요했다.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었고 열흘 동안 목숨을 건 농성투쟁을 해야 했던 것 뿐이 아니다. 회사가 폐업해 일자리를 잃게 되자 그의 아내는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해 뱃속에 있던 둘째 아이를 유산한 것. 당시 그의 아내는 임시 5주였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5년 11월 14일 오전 9시 56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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