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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역사이야기

'미스터 선샤인'이 일깨우지 못한 '나라망친 군주' 고종

by betulo 201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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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하는데 나는 '미스터 선샤인'을 정주행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 드라마에서 고종이라는 임금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드라마를 다룬 기사를 읽어보니 '비운의 군주'로 묘사하는 걸 알겠다. 우연히 '미스터 선샤인'에서 고종이 안하무인하는 일본군 장교를 준엄하게 꾸짖은 뒤 의병에 연류된 장수를 격려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만약 내가 고종을 전혀 몰랐다면 그를 꽤나 멋진 임금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고이 무능한 임금이었는지 유능한 임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라 망했는데도 9년이나 궁궐에서 일본이 준 작위 유지하며 살다 죽은 행태로 보건데 나는 고종에게 눈꼽만큼도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비운의 군주'가 아니라 그냥 최고위급 친일파일 뿐이다.

 

그의 재위기간이 44년이다. 그가 임금이 된 때는 대체로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조선이나 일본이나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회와 위기 사이에 존재했다. 하지만 44년이 지난 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할 만큼 강력해졌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며 그 수명을 다해버렸다. 조선의 임금으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흥선대원군이 엉망이 된 나라를 정상화시키느라 고군분투한 반면,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친정을 시작한 1873년, 그리고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부터 갑오농민전쟁이 벌어진 1894년까지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무얼 했던가. 현직 군인들이 임금체불과 부당한 대우에 저항해 발생했던 이른바 임오군란이 1882년이었다. 그리고 12년뒤에는 민초들이 매관매직과 가렴주구에 폭발해서 낫과 죽창을 들고 일어났다. 


 당시 군인들과 민초들이 무엇에 반발했고, 고종과 그의 아내 이른바 민비는 어떻게 대응했던가. 탐관오리가 1차 원인을 제공하고 외세 끌어들이며 왕권유지에만 매달렸다. 개혁이니 개화니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선에서만 용인하고 격려했을 뿐이었다. 탐관오리는 어떻게 창궐했는가. 바로 고종과 민비를 정점으로 한 매관매직에서 파생된 구조적인 문제였다. 한마디로 임오군란은 갑오농민전쟁을 미리 보여준 예고편이었다. 갑오농민전쟁에서 수없이 많은 농민군을 죽인 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이었다. 그렇게 고종은 조선의 마지막 개혁 동력을 짓밟아버렸다.  


2008년에 고종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한겨레'에서 지상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당시 고종을 강하게 비판한 박노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그런 점에 비춰볼때 박노자는 고종이 “차라리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고 꼬집었다.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


왜 조선이 망하고 10년도 안된 1919년 3.1운동때 왕정복귀를 주장하는 외침이 없었을까. 왜 500년이나 되는 왕정의 역사를 겪었는데도 왕당파가 의미있는 독립운동세력이 되지 못했을까. 그 어느 누구도 고종과 순종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실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망해도 아주 더럽고 치사하게 망해서 이 땅에서 왕당파를 없애버린것. 그건 고종의 업적으로 인정해주겠다.


사족: 차라리 그때(1898년) 그리 좋아하던 커피 마시다 그냥 죽었더라면 '비운의 군주'라고 떠드는 소리에 가만히 있기라도 하련만...


2010/10/11 - 예산문제로 본 대한제국,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

2009/08/04 - 대한제국 국가예산 2%는 제사지내는 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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