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 3월 남해안 일대에 전염병이 번졌다. 이순신 역시 12일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 좁은 배 안에서 함께 생활하던 조선 수군에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투 중 전사자보다 몇 배 더 많았다. 1594년 4월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를 보면 전염병 사망자가 1904명, 감염자는 3759명으로 전체 병력 2만 1500명의 40%가량이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시 전염병이 창궐한 1595년 수군 병력은 4109명까지 감소했다(나승학. 2017). 당시 이순신이 전염병에 쓰러졌다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끝났을까?
숙종 10년(1683) 숙종이 천연두에 걸렸다. 첫 부인인 인경왕후 김씨를 천연두로 잃은 숙종을 살리기 위해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당이 알려 준 황당무계한 처방에 따라 한겨울에 소복 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이로 인해 병을 얻어 12월 5일 사망했다. 명성왕후는 숙종이 총애하던 중인 출신 궁녀를 궁궐에서 쫓아낸 적이 있는데 명성왕후가 죽자 숙종은 그 궁녀를 궁궐에 다시 데려왔다. 그 궁녀가 나중에 경종을 낳은 장희빈이다.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극의 단골 소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 이야기는 물론 경종과 영조로 이어지는 왕위계승 과정의 갈등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순간에 전염병이 있었다. 지금처럼 보건위생 개념이 발달하지 않고 상하수도 시설과 화장실 설비가 부족했던 전근대사회에선 대규모 전염병이 빈발했으며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역사의 물줄기까지 바꾸는 일도 잦았다.
고대 아테네에서 기원전 430~428년 발생한 전염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양상을 바꿨다. 당시 아테네 성벽 안에 있던 주민 가운데 3분의1이 사망했고 그중에는 페리클레스도 있었다. 특히 아테네가 자랑하던 해군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칭기스칸의 손자로 몽골제국 네 번째 칸이었던 멍케는 남송(南宋) 원정을 이끌던 1259년 여름 지금의 쓰촨성 지역에서 갑작스레 사망했다.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몽골제국사인 ‘집사’(集史)는 멍케를 쓰러뜨린 전염병을 ‘바바’라고 표현했다. 정확히 어떤 전염병이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일부에선 흑사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멍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그늘에 가려 있던 동생 쿠빌라이가 몽골제국의 칸이 됐다. 멍케를 만나러 가던 도중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로 되돌아가던 고려 태자 일행은 쿠빌라이와 만나면서 쿠빌라이와 고려 태자 사이에 일종의 밀약이 이뤄진다. 당시 반란군 처지였던 쿠빌라이에게 고려 왕자는 명분을, 무신정권에 기를 펴지 못하던 고려 태자에게 쿠빌라이는 왕실의 권위를 되찾게 해주는 후원자로 작용했다.
쿠빌라이가 "고려는 당태종도 정복하지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하는 건 하늘의 뜻이다"고 했다는 발언, 그리고 고려에게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하는 것 모두 이런 상호관계의 산물이었다. 고려 고려 태자는 훗날 고려 원종이 되고, 원종과 쿠빌라이는 사돈 관계로 이어진다. 만약 그때 멍케가 죽지 않았다면 고려의 운명은, 남송의 운명은, 더 나아가 세계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염병은 때로 제노사이드보다 더한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뒤 발생한 대규모 전염병은 원주민 인구 가운데 90%를 몰살시켰다. 오늘날 미국에 해당하는 지역만 해도 인구가 1500년 500만명에 달했지만 1800년에는 6만명으로 줄었다. 콜럼버스 일행이 처음 상륙했던 히스파니올라섬의 인구는 1492년 무렵 약 800만명 규모였는데 1535년에는 0이 됐다. 1779년 쿡 선장과 함께 하와이에 상륙한 각종 전염병으로 인해 하와이 인구는 1779년 약 50만명에서 1853년에는 8만 4000명으로 감소했다.
세균 입장에선 농경, 도시, 무역, 전쟁이 모두 로또 그 자체다. 천연두가 '안토니우스 역병'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도달한 결과 AD 165~180년에는 로마 시민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흑사병도 '유스티니아누스 병'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처음 나타났다(AD 542~543년). 흑사병이 유럽을 본격적으로 뒤흔든 것은 1346년의 일이었다. 흑사병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4분의1 가량을 몰살했다(제레드 다이아몬드. 2005: 300).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
천연두, 콜레라… 조선을 뒤흔든 전염병
한국사에서 전염병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건 '삼국사기'에 실린 온조왕 4년(기원전 15년) 기록이다. 짧게 '역(疫)'이라고 돼 있다.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역병 기록은 통틀어 20여차례 보인다(허정, 2002, 133). <고려사>에도 전염병 관련 기사가 20여개 등장하는데 눈길을 끄는 건 예종(1122년), 덕종(1034년), 인종(1136년)에 왕들이 잇따라 사망한게 전염병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1110년(예종5)에 발생했다는 전염병은 시체와 해골이 길에 널릴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이현숙, 2007: 14~15).
1279년에는 탄저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발생했다. 탄저병은 840년 위구르 유목제국을 멸망시킨 핵심 원인으로 지목됐던 전염병인데 고려에 탄저병이 돌았다는 건 몽골과 접촉한게 한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1281년(충렬왕7)에는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일본원정을 할 즈음 일본에서 발진성 질환이 크게 유행했다는 것도 집단간 접촉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한 사례로 볼 수 있다(이현숙, 2007: 34).
조선 중종 19년(1524) 7월 평안도관찰사 김극성의 보고서가 국왕에게 도착했다. 평북 용천군 지역에 전염병이 돌아 670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안도 전역과 황해도까지 전염병이 전파되면서 이듬해 가을까지 사망자는 2만 3000여명에 달했다. 중종대 인구가 400만명 내외로 추정되니까 전체 인구의 0.5%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현재 남북한 인구 7000만명을 대입해 보면 35만명가량이 전염병으로 사망한 셈이다. 이 전염병은 ‘티푸스’로 추측되고 있다.
17세기는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였다. 이상저온현상으로 냉해 피해가 속출하고 가뭄과 수해가 빈발했다. 자연재해는 기근을 일으키고 기근은 면역력을 약화시켜 전염병에 취약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연스레 각종 전염병이 빈번했다(이규근, 2001: 39). 특히 천연두가 많았다. 천연두는 이집트 미라에서 마마 자국에서 추론한 연대가 BC 16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재레드 다이아몬드, 2005: 299). 천연두는 조선에선 두창, 마마, 손님 등으로 불렀다. ‘백세창’이라고도 했는데 평생 한 번은 겪고 지나가야 하는 질병이라는 뜻이었다.
공기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질환인 천연두는 일단 감염되면 고열과 발진이 일어나고, 두통과 구토 등을 일으킨다. 얼굴, 손, 몸통에 발진이 생긴다. 증상이 일어난 지 8~14일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그 흉터를 흔히 마마 자국이라고 부른다. 1886년 제중원에서 작성한 ‘조선 정부 병원 1차연도 보고서’에서 4세 이전의 영아 40~50%가 두창으로 사망한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치료법도 발전했다. 일종의 백신을 활용한 치료법인 인두법이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병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한 오명항(1673~1728) 초상. 가로 1.03m, 세로 1.74m로 비단에 채색해 그린 전신상으로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얼굴 가득 천연두로 인한 흉터, 일명 마마 자국이 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터럭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원칙 아래 극사실주의적 화풍을 견지했던 덕분에 오명항의 얼굴에 생긴 천연두 흔적을 사진 보듯이 확인할 수 있다. 전근대사회는 천연두를 비롯해 홍역, 티푸스,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이 매우 흔했다. |
1821년(순조 21년) 조선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전염병인 ‘콜레라’로 치명상을 입는다. 그해 8월 평양감사 김이교가 작성한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갑자기 괴질이 발생해 구토와 설사와 가슴이 막혀 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다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눈앞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김신회, 2014: 419).”
인도 풍토병이었다가 1817년 콜카타에서 본격 발병한 콜레라는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휩쓸었다. 콜카타에 있던 영국 군인 5000명을 1주일 만에 몰살시킨 콜레라는 1819년에 유럽, 1820년에는 중국에 상륙했다. 콜레라가 상륙한 최초 유럽 도시였던 러시아 모스크바에선 1830년 감염자 사망률이 50%를 넘어서면 공포에 질린 모스크바 시민들이 인근 도시로 탈출하는 행렬이 이어졌다((김신회, 2014: 456)
조선에 상륙한 콜레라는 1821년 9월 17일 황해감사 이용수가 “사망자가 8000~9000명에 이르며 한창 앓고 있는 무리는 그 수를 다 셀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확산됐다. 심지어 당시 수원에서 진행중이던 정조(1776~1800)의 능을 이장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료들과 상여를 매는 일꾼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해 일이 제대로 진행이 안될 정도였다(김신회, 2014: 426~427). 콜레라는 중부지방을 통과해 제주도까지 퍼졌다. 지역별로 수만명에서 10만명까지 죽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조선 인구가 1000만명 정도였는데 1807년과 1835년 사이 조선 인구가 100만명가량 줄어들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콜레라의 위세에 순조 초 영의정을 지냈던 이시수를 비롯해 훈련대장 서영보, 어영대장 장현택 등 고관대작도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 사신이 숨지기도 했다(김신회, 2014: 436). 결국 콜레라는 세도정치로 갈수록 쇠약해지던 조선에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다(이상곤, 2014: 363).
콜레라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과 1920년에도 심각하게 유행했다. 1919년 8월부터 환자 1만 6715명이 발생해 1만 895명이 사망했고 1920년에는 환자 2만 4045명에 사망자 1만 3455명이나 됐다. 치사율이 각각 65.2%와 56%나 되는 무시무시한 위력이다(정민재, 2015: 526).
1918년 처음 발병해 감염자 5억명에 사망자가 최소 2500만명에서 최대 1억명으로 추산되는 ‘스페인 독감’은 바로 그 해 한국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1918~19년에 환자가 무려 739만 414명이 발생해 13만 9137명이 사망했다. 1920년 11월부터 1921년 4월까진 환자 37만 8440명에 사망자 4만 1407명, 1920년 10월부터 1921년 3월엔 환자 3만 3720명에 사망자 1208명이다(정민재, 2015: 526).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콜레라와 스페인 독감을 비교해보면 치명률과 전염력이 반비례 관계라는 사실이 다시한번 드러난다.
(사실 스페인 독감의 최최 발원지는 미국이다. 그런데도 스페인 외부 지역에서는 이를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당시 스페인이 비교전국이었고 보건 문제를 비밀로 유지하기 위한 전시 검염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크로스비, 2010: 40).
전염병 때마다 등장하는 소수자 혐오
전염병이 번질 때마다 등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수자 혐오다. 질병의 원인을 ‘저들’에게 돌리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오랜 못된 버릇이다. 19세기 콜레라가 한창일 당시 청나라에선 반체제 성향 신흥종교인 백련교도들에게 혐의를 돌리기도 했다. “백련교도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오이밭에 독약을 뿌려 생긴 질병”이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이상곤, 2014: 362).
1831년 헝가리에선 콜레라로 10만명 이상이 사망하자 독에 당했다고 생각한 농민들이 성을 포위하고 의사와 장교, 귀족들을 죽이는 일도 있었다(김신회, 2014: 456).‘스페인 독감’만 해도 최초 발생지인 미국에선 “독일인 때문에 생겼다”, “동유럽 이민자 때문에 생겼다”, “흑인 때문”이라는 등 소수자에게 원인을 돌리는 각종 소문이 횡행하기도 했다(김서형, 201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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