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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매뉴얼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by betulo 201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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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처 설립과 별도로 재난상황에 대비하는 위기관리 매뉴얼을 정비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하지만 기껏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활용을 하지 않는다면 없는니만 못한 결과만 초래한다. 또 끊임없는 반복훈련을 통해 매뉴얼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이 없다면 매뉴얼은 쓸모없는 죽은 문서가 되거나 위기관리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책상 위에서 만들고 훈련을 통해 현실성을 점검하지도 않는 매뉴얼이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아픈 교훈을 줬다. 재난상황에서는 초동대응이 생사를 가른다. 초동대응은 결국 지자체 역량, 그 중에서도 현장에 있는 일선 재난담당 공무원들이 핵심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 움직임은 고위급 지휘체계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지자체 재난대비 역량을 키우기 위한 논의는 뒷전이다. 순환근무로 전문성없는 인력으로 구색만 갖춰놓은게 전부인데다 실질적인 훈련과 점검을 위한 중앙정부 예산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해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펴낸 ‘재난관리 역량 진단을 통한 교육훈련 개선방안’에 따르면 지자체 재난안전 공무원 중 32.6%만이 전문성이 있다고 자체평가했다. 특히 3년 이상 관련 분야에서 일한 사람은 19% 뿐이고 자신들이 이수한 재난관련 교육훈련에 대해 72.9%가 실무와 연계성이 떨어진다고 답했다.


 일목요연하고 명확한 매뉴얼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위기대응을 책만 갖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체계적인 훈련이 없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2012년 11월 불산가스 누출사고를 비롯해 화학물질 시설에서는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위험작업 인력을 외주업체에 맡기고 작업인원은 비정규직으로 하면서 사고위험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구미 사고 당시 매뉴얼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거센 비판을 받았던 환경부는 매뉴얼을 수정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실제 적용 훈련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한겨레 140514)


 후쿠시마 사고 이후 경각심이 높아진 원자력발전소 위기대응도 매뉴얼과 훈련을 강화하는 제도개선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훈련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보여주기식이어서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한겨레 140520)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무역센터 트레이드타워에서 실시한 가상화재발생훈련 역시 다르지 않다. 방문객 혼란을 우려해 비상경보음도 켜지 않았고, 심지어 코엑스몰은 훈련에서 제외시켰다. 상주인원 가운데 75% 가량은 훈련에 참여하지도 않았다.(서울140514)


 그나마 매뉴얼 정비도 지지부진하다. 현재 정부는 지난해 개정한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라 기존 사안별 매뉴얼을 미국 방식을 벤치마킹하는 13개 공통분야로 바꾸는 작업 진행중이다. 현재 7개 사항에 대해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국가안전처 신설 방침을 밝힌 뒤 소방방재청 역시 조직개편 소용돌이에 빠지는 바람에 매뉴얼 작업에 차질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참여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했던 A씨는 매뉴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그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각종 상황을 가정하고 대응방안을 토론하고 정리했다"면서 "처음 하는 작업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국가안보를 튼튼히 한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당시 참여정부는 위기관리 표준매뉴얼 33개, 위기대응 실무매뉴얼 276개, 현장조치 행동매뉴얼 2400여개 등 2800여개에 이르는 매뉴얼을 만들었다. 위기 단계에 따라 상황별로 정부부처간 역할분담, 소속기관 공무원들의 실무지침, 지방자치단체 현장조치 요령법 등을 정했다.

 거기다 별도 주요상황 매뉴얼 7개는 매뉴얼에 없는 사고가 날 때 대응요령까지 규정했다. 고생해서 만든 매뉴얼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뒤 곧바로 창고에 쳐박히는 신세가 됐다. 매뉴얼의 일관성이 없으니 사고대응의 일관성까지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 140521)


 재난관리 전문가들은 ‘매뉴얼 만능주의’를 경계했다. 이들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매뉴얼을 그때 그때 만들다 보니 정작 사고가 터졌을 때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최소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훈련을 강화하는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지적했다.

 이동규 동아대 석당인재학부 교수는 “일반적인 원칙을 정리한 가이드라인이라도 만들고 그것만이라도 열심히 훈련해서 준수하도록 하는게 훨씬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재난은 매뉴얼이 아니라 학습과 교육훈련, 경험에 따른 판단력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재난관리 전문가는 “모든 사안을 아우르는, ‘만기친람’형 매뉴얼을 만드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면서 “정부는 무슨 일만 있으면 매뉴얼을 만들어라, 매뉴얼을 점검해라 하는 매뉴얼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지금처럼 땜빵식으로 매뉴얼 만드는 방식으로는 사람들이 숙지하기도 힘들고, 급박한 현장 상황에 적용하기도 힘들다”면서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형태로 단순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정부는 그동안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매뉴얼을 만든 뒤 미리 정해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훈련하는 행태를 되풀이했다”면서 “위기 상황에선 예상이 빗나가고 매뉴얼은 무용지물이 되고, 결국 위기로 치닫게 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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