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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우리 마음속의 '수령님', 글로벌 스탠더드 혹은 아메리칸 스타일

by betulo 2009.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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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박시형이라는 북한 역사학자가 1979년에 쓴 <발해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89년 서울에서 정식 출간된 그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뭔가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수령님 교시’가 먼저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 ‘교시’라는 게 대부분 ‘공자 왈 맹자 왈’ 에 다름 아니다. 가령 ‘발해의 문화’를 서술하는 부분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향유한 문화민족이었습니다.”고 밝힌 다음 발해의 문화를 설명한다. ‘발해인의 무예’를 설명할 때는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운동을 잘 했습니다.’는 식이다. 우스갯소리로 “옳은 얘기, 맞는 얘기는 수령님이 다 해버렸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시형은 1946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지낸 북한 역사학계의 원로다. 그런 사람조차 뭘 설명하건 ‘위대한 수령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는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럼 만약 위대한 수령님이 잘못 말씀하신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령 수령님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담배를 사랑하는 민족이었습니다.’라고 교시했다면 국민건강을 위한 금연논의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수령님께서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예로부터 현모양처가 많았습니다. 요리도 잘했습니다. 자식농사도 잘 지었습니다.’라고 교시했고 우리가 그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겨야 한다면 양성평등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 비판정신은 빛을 잃어버린다. 심한 경우 자기 머리로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국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입만 열면 ‘위대한 수령님’으로 시작하는 북한은 비판거리이거나 조롱거리다. 하지만 ‘땡전뉴스’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수령님 뒤에 숨어 비판정신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장에 속 편하고 마음 편하니까 누구도 거역하기 힘든 어떤 권위를 만병통치약처럼 휘두르는 건 아닐까.


비판과 토론이 사라지고 ‘위대한 수령님’만 쳐다본 결과는 뭘까. 병자호란 이후 ‘소중화(小中華)’ 의식과 예학(禮學) 중심의 고루하고 보수적인 학문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적 정체’를 낳았던 조선시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상조류는 대부분 ‘노론’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경우 “송나라 주자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심지어 주자학을 비판한 학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711 년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 막부의 거물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에게 “귀하의 나라에는 만국전도도 없습니까?”라며 면박을 당했다. 일본 학자들이 세계를 배우고 있을 때 통신사 일행은 기껏 청나라도 중화문명의 정통인 조선을 존중한다는 얘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50여년이 지난 1764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최신 학술정보 수집에 나서야 할 정도로 학문수준이 역전됐다.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토대 교수에 따르면 “1826년 연행사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신재식이 청나라 학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이 조선 선비는 16세기 이후 근래의 학자는 단 한 사람도 거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출처=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미국 발 금융위기 속에서 ‘미국=글로벌 스탠더드’라 확신하는 그 많은 경제학 교수들과 전문가들, 경제 관료들은 제대로 된 설명조차 못하며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위대한 미국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만 되뇌며 규제완화와 금융 중심의 시장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규제강화와 금융통제에 나서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미국 발 금융위기를 규제완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거나, 개방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금융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한국 정부만 자본시장통합법이나 금산분리 완화 법제화, 산업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려 한다.


1997년 외환위기도 ‘오로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한 일이고 그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준 ‘글로벌 스탠더드’의 ‘교시’를 따르고 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기는 순간 비판정신은 사라진다. 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이름으로 미국이라는 위대한 수령님에 의지하는 순간 미국 발 금융위기는 규제완화를 제대로 못해서 생긴 일이 돼 버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수령님 말씀이 아니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비판정신이다. 우리에겐 ‘내 탓이오’가 아니라 ‘따질 건 따지자’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이 글은 <인권실천시민연대>에 기곳했던 글입니다.
http://www.hrights.or.kr/note/read.cgi?board=gasi&y_number=99&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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