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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노회찬 "우리는 서민정당이 아니었다"

by betulo 2009.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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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사내 공부모임인 ‘연대와 희망’은 지난 1월 16일 진보신당 공동대표 노회찬을 초청했다. 노회찬은 이 자리에서 이XX 정부 평가와 진보의 재구성 등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두시간에 걸쳐 밝혔다. 그가 강연에서 밝힌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나눠 싣는다. 이 글은 두번째 순서다.

진보신당 공동대표 노회찬은 17대 국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의 핵심엘리트들이 움직이는 매커니즘을 온몸으로 경험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가 경험한 4년은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보정당에는 그런 인사가 매우 적다는 현실에서 더욱 그렇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4년을 어떻게 평가할까.


노회찬은 2004년 국가보안법폐지국면에 아쉬움이 많다.


그는 작년 1월부터 서울 노원(병)에서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유권자들한테 받을 예상 질문을 쭉 뽑아서 맞춤형 답변을 연습했다고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는 헛수고했다. 예상질문이었던 “너무 과격한 거 아니냐” “너무 한쪽으로 편향된 거 아니냐” “중간에서 폭넓게 해야 하지 않느냐” “왜 밤낮 데모만 하느냐” 같은 질문들은 선거운동 석 달 동안 거의 듣지 못했다. 


노회찬이 주로 들었던 질문은 “서민들 먹고 살게 해달라.”였다. 좀 우호적인 사람은 “서민을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일해달라”고 당부했다. 노회찬에게 상당히 놀라웠던 건 진보신당이 워낙 인지도가 낮아서 노회찬을 민노당 후보로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 눈에 비친 민노당은 서민정당 혹은 서민의 대변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서민정당? 착각이었다!”

“민주노총이 대기업 중심이다 보니 사람들은 민주노총을 서민을 위한 조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돈 꽤나 받는 정규직 조직으로 민주노총을 인식하는 거다. 가령 민주노총 핵심조직인 현대자동차가 파업한다고 하면 서민들은 곱게 보질 않는다. 


노회찬은 국회의원일때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던 경험에서 그 단초를 지목했다.


“그 넓은 현대차 공장에서 옷차림만 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별할 수 있다. 일은 섞여서 같이 하는데 복장이 다르다. 민노당 의원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정규직은 우리를 보면 장갑을 벗고 반갑게 악수한다.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눈다. 비정규직은 장갑 안벗는다.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도 외면하기도 한다.”


비정규직들을 위한 의정활동을 표방했던 민노당 의원들이 외면받은 이유가 뭘까. 노회찬은 이렇게 설명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일은 똑같은데 월급은 절반밖에 안된다. 정규직노조가 파업이라도 하면 비정규직은 일감이 없어서 굶어야 한다. 정규직노조는 2층짜리 단독건물을 노조사무실로 쓴다. 상근자도 엄청 많다. 비정규직노조 사무실은 공장 한켠에 한 평 정도 된다. 노조 설립하고 나서 1년까지는 유선전화도 회사에서 안 놓아줬다고 한다.”


노회찬은 말한다. 비정규직들 입장에선 정규직노조가 자기들 편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정규직노조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민주노총을 민노당이 지원한다. 당연히 민노당도 비정규직 편이 아니라고 본다. 비정규직노조에게는 정규직노조=민주노총=민노당이다. 그런 확고한 인식이 있다. 


“의정활동 준비부족 반성한다”


노회찬은 “민노당이 정말로 당시에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인식됐다면 지난 대선 지지율이 20%는 거뜬했을 것”이라면서 “돌이켜보면 진보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준비 부족, 정치력 부족, 전략 부족... 그런걸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노당 창당 주역이었던 노회찬으로서는 민노당 초기 성장세는 놀라울 법 하다. “민노당이 2000년 1월 창당했다. 처음에 당원 7000명, 1년만에 두배, 2년차에 3만, 3년차에 5만, 4년차에 7만, 나중에 10만 됐다. 지지율 변동도 놀라웠다. 처음엔 1~2%였다. 17대 총선에서 정당투표로 13.4%까지 기록했다. 그해 말 지지율이 18~19%까지 나오기도 했다.”


13%였다. 노회찬은 이 수치가 얼마나 적지 않은 수치인지를 설명한다. “선거제도 문제 때문에 10석이었던 거지. 프랑스나 독일에서 13%라면 299석 기준으로 40석은 된다. 그 정도면 연정 제1파트너까지도 가능하다. 작년 11월에 노르웨이 방문해서 보니 주요 연정파트너 득표율이 8%더라.”


노회찬은 “민노당이 창당 4년만에 13%했다는 건 진보에 대한 수용력이 꽤 있다는 증거”라면서 “문제는 그걸 더 끌어내는 것과, 고정지지로 만드는 거였는데 민노당 의정 4년에 결과적으로 제대로 못하니까 국민들이 지지를 철회한것이지 국민이 보수화된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의정활동 4년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여기서 노회찬은 강연에서 가장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다. 자신의 의정활동에서, 민노당 의정활동 4년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 두가지를 꼽았다.


먼저 민노당이 총선에서 내세워 큰 성과를 거뒀던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공약을 제대로 끌고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그 공약의 실현가능성을 본게 아니다. 그런 얘기가 계속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던거다. 문제는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를 민노당의 브랜드로 하지 못했다는 거다. 다른건 몰라도 서민생활 민생은 확실하다는 인식을 굳히질 못했다.”


노회찬은 “2004년 원내 진출했지만 민노당은 한 해 내내 열린우리당이 벌인 국가보안법 판에 휩쓸렸다.”면서 “2004년에 국회 들어갔는데 1년만인 2005년 가을에야 무상교육 무상의료 부유세 관철 위한 본부를 만들었다. 노력도 별로 안하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고 아쉬워한다.


국가보안법 논쟁도 아쉬운 대목이다. 당시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고수하자는 쪽은 한나라당 내에서도 적었다. 국가보안법 7조(이적단체, 이적표현물, 이적행위)만 없애자는게 한나라당 개혁파와 민주당 주류 입장이었다. 열린우리당 강경파와 민노당은 완전폐지를 주장했다.


“결과를 봐라. 손도 못댔다. 지금와 생각하면 7조만 없애자고 드라이브 걸었다면 한나라당도 반대 못했을거다. 국가보안법 사범 보면 95%는 7조다. 나머지는 간첩처럼 국보법 없더라도 잡혀갈 사람들이었다. 당시엔 나도 국보법 완전폐지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반성할 부분 있다.”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선언한 것을 계기로 탄생한 특검도 많이 아쉬운 대목이다.


“나는 특검 주장했다. 결국 어정쩡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공략해서 특검법안 관철했다. 당시 최병국 법사위원장이 ‘이 법은 노회찬법’이라고 할 때 한껀 올린거라 봤다. 지금 와 생각하면 경륜부족이다. 당시 검찰이 몰려 있었다. 검찰이 수사하면 100중에 40까지는 수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에선 구석에 몰린 검찰이 대검중수부장 지휘받는 특별수사본부에 삼성 수사 열심히 해 좌천된 사람들로 구성했다. 이들이 당시에 제일 수사 잘할 사람들이었다.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특검 때문에 중단됐다.”


노회찬은 “특검이 검찰보다 잘한다는 보장도 없고, 특검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판도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노무현이 검찰보다도 의지가 적었다.”면서 “민변이 추천한 변호사가 했으면 100중에 60은 했겠지만 노무현은 삼성맨을 특검으로 임명했다. 나는 그것까지 내다보지 못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운동권 관성과 흑백논리로 인해 생긴 반성할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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