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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응어리진 15년 그러나 희망을 꿈꾼다

by betulo 2007.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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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어리진 15년 그러나 희망을 꿈꾼다
김기설씨 유서대필 사건으로 옥고 치른 강기훈씨
2006/5/8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1991년 5월 8일 전국민주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김기설씨가 노태우정권을 규탄하며 분신자살했다. 정부는 당시 김기설씨 동료인 강기훈씨를 분신배후자로 지목했고 강기훈씨는 옥고를 치뤄야 했다. 당시부터 조작의혹이 끊이지 않았지만 15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김기설씨 15주기를 맞아 강기훈씨를 인터뷰했다. /편집자주

“사진은 찍지 말아주세요.”

인터뷰 요청을 수락하면서 강기훈씨가 내놓은 첫마디였다. “사진 찍는 것도 즐기지 않고 나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양해를 구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1991년 그에게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내 얼굴이 나오고 나서 거래처 쪽에서 생경하게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했지요. 부담스럽더라구요. 그 뒤로는 언론에 내 얼굴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습니다. 진실규명에 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1991년 5월 8일은 김기설 열사 15주기가 되는 날이다. 강기훈씨는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혐의로 3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출소한 이후 1년 정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일한 이후 10년 넘게 IT쪽 일을 하고 있는 강씨는 얼핏 평범한 ‘소시민’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명’과 ‘억울한 옥살이’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게 깊은 응어리를 남겼다.

강기훈씨는 15년전 응어리진 상처가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사건을 조작했던 주동자들이 법정에 서는 그날을 꿈꾼다. 사진은 지난해 3월 열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결성 기자회견 모습.
<시민의신문DB자료사진> 양계탁기자

강기훈씨는 15년전 응어리진 상처가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사건을 조작했던 주동자들이 법정에 서는 그날을 꿈꾼다. 사진은 지난해 3월 열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결성 기자회견 모습.

인터뷰 내내 강씨는 ‘사건’에 대한 질문에는 말을 아꼈다. “당시 담당 검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느냐”는 질문에는 “욕만 나올 것 같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전부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드러내는 심중은 그가 받은 상처가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해주면 싶은 말이요? 과거 잘못을 반성하라는 말이 빼고는 전부 욕만 나올 거 같네요. 되도록 생각을 안하려 합니다. 그 당시 생각하기 시작하면 일이 안 될 정도니까요. 기대감 갖기 시작하면 끝이 없잖아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성격이 달라졌다는 얘길 주변에서 듣기도 한다. “친하게 지내는 어떤 후배는 저보고 ‘컬트’라고 하더라구요.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요. 종잡을 수 없게 됐다는 얘기도 가끔 듣습니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성격이 냉소적이예요. ‘사건’ 이후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심해진 건 사실입니다.” 그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지하철을 탔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왜 이러나 싶었죠. 점점 심해지더라구요.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길이 막히고 시간이 아무리 더 걸려도 버스를 타거나 차라리 걸어다닙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게 있다. 전쟁이나 교통사고, 폭행, 강간, 홍수 등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을 경험한 사람이 외상적 사건이 회상이나 꿈 등으로 반복되며 외상과 연관된 자극에 대해 지속적으로 회피하며 신체적으로 긴장, 경계 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질환을 말한다. 그에게는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로 나타났다. 지하철, 노래방, 지하상가, 지하실 등 밀폐된 공간은 지금도 그에게 ‘기피대상’이다.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꺼린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두통이 생기고, 귀가 징징 울리고, 손에 땀이 나고, 온몸에 힘이 빠지고.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런 증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죠. 힘들어요. 몸이 피곤하면 그런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김기설 열사 유족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않는다. 법정에서 김기설 열사 아버지가 “유서는 아들 글씨가 아니다”고 증언한 일은 지금도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당시 증언에 대해 한 번도 내게 당시 증언이 잘못됐다는 얘기를 한 적도 없습니다. 물론 유족들도 피해자이지요. 광주항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가해자가 나서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데 화해한다는 건 먼 나라 얘기일 뿐이지요.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한편에 있지만 감정이 용납하질 않습니다. 주위에서 만나서 얘길 해보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15년 동안 남모를 고통을 참으며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체념해 본적은 없다. “체념하면 그 순간 밥숟가락 놓아야지 않겠느냐”는 이유 때문이다. 언젠가 재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지고 당시 그에게 누명을 씌었던 이들이 죄값을 치를 것이라는 희망은 그에게 지금도 놓칠 수 없는 ‘목표’다. 그는 “유서대필의혹 자체가 날조라는 진상은 이미 다 규명됐다”며 “어떻게 허위감정을 했는지, 왜 허위감정을 했는지 등 당시 가해자들의 행동과 그 매커니즘을 밝히는 것이 진상규명 대상”이라고 말한다.

김기설 열사가 자살한 후 검찰은 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장 등 6명으로 전담조사반을 편성했다. 강신욱 검사는 2000년 7월 대법관이 됐다. 그는 오는 7월 10일 임기가 끝난다. 강씨는 말한다. “언제가 강신욱 법관이 법정에 피의자로 서고 내가 증언을 하러 가서 만나는 날이 오겠지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습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6년 5월 8일 오전 10시 9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시민의신문 제 648호 23면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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