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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이북5도위원회, 분단이 낳은 피해자 겸 가해자

by 자작나무숲 2007. 3. 20.


“여전히 망명정부? 민간단체로 바꿔야”
이북5도위는 분단이 낳은 피해자 겸 가해자
김귀옥 한성대 교수 이북5도위 존재 모순 제기

2005/1/14


  “이북5도위원회는 명백히 국가조직이자 정치조직입니다. 위상과 역할, 근본성격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 할 시점입니다. 정부가 흡수통일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해서도 안되는 상황에서 북한 점령통치를 가정하는 ‘망명정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이북5도위원회를 민간단체로 바꾸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사회학 박사. 오른쪽 사진)는 이제 이북5도위원회를 해체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출범 자체도 모순이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이북5도 도지사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도 모순”이라며 “이북5도위원회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북5도위원회가 도지사, 시장, 군수, 면장까지 거느리는 것을 꼬집으면서 “국민세금으로 그런 일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정부를 비판했다. 김 교수는 월남민 정책에 대해서도 “정부가 월남민과 월북인 가족을 이산가족이라는 범주에서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동안 이북5도위원회가 비판을 거의 받지 않았던 것에 대해 “사람들이 당연히 있는거라 생각하는 관성이 붙은 것 같다”며 “언론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 가운데 상당수가 이북5도민 출신이었다. 그후 경상도 세력이 사회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세력관계가 바뀌었고 월남민들은 노령화되면서 권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97년 대선 이후 변화 흐름 감지”


  김 교수는 1997년 대선 이후 이북5도위원회 성격변화가 감지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엘리트 월남민들은 이회창 후보 지지에 총력을 기울이다가 막상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내부에서 상당한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이들은 ‘묻지마 반공’은 안되고 정부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인식하게 됐다. 


  게다가 구제금융사태로 동화은행이 퇴출된 것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동화은행은 ‘이북5도민을 위한 은행’을 목표로 1989년 설립된 은행이었다. 정부예산 말고는 물적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정부와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결국 “두고 보면서 비판적 지지를 하게 됐다.”


  이산가족 문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이북5도위원회에 관심을 갖게 된 김 교수는 이북5도위원회가 긍정적인 구실도 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북5도위원회는 월남민에게 원적을 발급해주고 북한에서의 경력도 증명해주는 등 월남민들에게 ‘상상속의 고향’ 구실을 했어요. 남북대화가 단절돼 있을 때 이북5도위원회가 사실상 월남민들의 정부 노릇을 한 것이지요.”


  반면 이북5도위원회가 한국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으로 김 교수는 ‘반공규율사회’ 강화를 꼽았다. “월남민들은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북5도위원회는 이런 다양한 경험과 역사를 반공으로 획일화시켜 버렸습니다. 자신들을 ‘카인의 후예’ 때문에 ‘낙원’에서 쫒겨난 ‘아벨’로 묘사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왜곡한 역사를 강요했지요. 이들은 한국사회가 역사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이북5도위원회는 분단이 낳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셈입니다.”


“이북도민 800만 주장은 억지”


  이북5도위원회는 항상 “800만 이북도민”이고 “한국전쟁 전에 월남한 사람과 한국전쟁 중에 월남한 사람이 7:3”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 교수는 “800만 주장은 억지춘향이고 월남 시기별 비율도 3:7이 맞다”고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이북5도위원회와 이북도민회 간부진의 월남시기별 비율이 7:3”이라며 “전쟁 전에 월남한 사람이 많으니까 모든 월남민이 그런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 실제 월남민은 얼마나 될까? 한국전쟁 직후 월남민을 100-120만으로 추정하는 김 교수는 “1세대부터 3세대, 4세대까지 다 포함해서 800만 이북도민을 강조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월남민 2세대는 부모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겠지요. 그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부모의 역사일 뿐 2세대 자신의 역사는 아니지요.”


  1994년 무렵 정부는 인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월남민을 40만명 가량으로 계산했다. 김 교수는 “당시 40만명 통계가 나오자 이북5도위원회와 이북도민회가 발칵 뒤집혔다”고 귀띔한다. 그는 “박정희 정권 당시에도 정부가 월남민 숫자를 조사하려 하자 이북5도위원회와 이북도민회가 반대해 조사 자체를 무산시켰다”며 “800만 이북도민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언사일 뿐이고 소설 수준의 논리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이북5도위원회와 이북도민회를 장악한 이들은 자신의 반공 경험을 ‘투명하게’ 강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김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이들은 말 그대로 피난 온 사람이거나 소개당한 사람”이라며 “반공 경험이 없기 때문에라도 더 반공적 언사를 하고 반공을 내면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반공을 유달리 강조하는 월남민을 만나면 실제로는 반공과는 무관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월남민을 엘리트 월남민과 일반 월남민으로 구별하는 김 교수는 학력, 반공에 대한 자기 보증, 군경력 입증 등을 기준으로 제시했다. 위 세가지를 충족하는 월남민이 성공적으로 한국 엘리트사회에 편입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전에 월남한 이들은 군대와 경찰에 간부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때 월남한 사람들은 군대를 기피하거나 사병으로 제대했지요. 장교로 제대한 사람은 좋은 직장을 구하기 쉽지만 사병으로 제대하면 그게 힘들지요. 거기다 군대기피는 반공규율사회인 한국에서 중요한 약점이 되지요. 결국 일반 월남민들은 ‘순종하며 동원되는 피동체’가 되버립니다.”


“언론이 월남민 획일화 강요”


  김 교수는 “월남민을 실향민과 반공전사로 고정시키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월남민을 획일적으로 보기는 언론도 마찬가지”라며 언론이 월남민을 대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자들은 그들을 옛날 슬픈 모습으로만 만들려 하지 말고 현재 그들의 삶을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많은 기자들이 명절이나 연말연시만 되면 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을 찾아요. 기자들은 항상 ‘할아버지 왜 내려오셨어요’ ‘누가 제일 보고 싶으세요’ 하는 식으로 물어보더라구요. 뻔한 대답을 유도하는 겁니다. 96년경에 이북출신 사업가 한 명이 청진에서 모래를 수입했는데 일부를 월남민들에게 준 적이 있었죠. 모래 나눠주는 날 기자들이 많이 왔는데 한 방송사 기자는 어느 할아버지에게 ‘고향 모래인데 얼마나 좋으냐. 카메라로 촬영해야 하니까 울어달라’는 요구까지 하더라구요.”




2005년 1월 14일 오전 7시 30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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