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필리핀에 M-1 소총 탄약을 수출하면서 ‘미약하게’ 시작된 한국 방위산업, 이른바 K방산은 이제 정부 스스로 ‘세계 4위 방산 수출국’ 목표를 거론할 정도로 체급이 높아졌다. 지난해 수주액 기준 173억 달러(약 23조원) 수출을 달성했고 올해 역시 200억 달러 수출을 노리고 있다. 정부 일각에서는 ‘방산 빅3’로 목표를 더 높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한 정부 관계자는 개인의견을 전제로 “러시아와 중국 방산 수출이 꾸준히 감소세다. 거기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수출 판로에 더 어려움이 커졌다”며 “장기 목표이긴 하지만 미국, 프랑스에 이어 빅3까지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K방산에서 가장 기대하는 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폴란드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는 지난해 K-2와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 4종에 대한 1차 이행계약으로 124억 달러를 체결했다. 지난해 방산 수출의 72%를 폴란드가 차지했다. 지난 5월에는 말레이시아와 FA-50 18대 수출 최종 계약(9억 2000만 달러, 약 1조 2000억원)을 체결했다.
수출 실적은 국제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18∼2022년 세계 무기 수출시장 점유율은 미국(40%), 러시아(16%), 프랑스(11%), 중국(5.2%), 독일(4.2%), 이탈리아(38%), 영국(3.2%), 스페인(2.6%)에 이어 한국이 9위(24%)를 차지했다. 2013~2017년과 비교한 수출 증가율은 한국이 74%인데 이는 세계 10대 방산 수출국 중에서 1위다. 러시아(-31%), 중국(-23%), 영국과 독일(-35%), 이스라엘(-15%), 스페인(-4.4%)에서 수출이 감소한 것과 뚜렷하게 다른 흐름이다. 앞에서 언급한 정부 관계자가 “빅3가 마냥 꿈은 아니다”고 말한 근거 가운데 하나도 러시아와 중국의 방산수출 감소였다.
K방산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확실한 가격경쟁력과 신속한 납품이 꼽힌다. 남북대치라는 특수한 안보환경으로 인해 체계적인 무기 제조와 실전 운용 경험까지 갖춘 한국의 장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력증강을 서두르는 폴란드를 비롯한 각국에 확실한 매력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도 한국 방산 수출이 빠르게 늘어나는 주요 원인으로 빠른 납기와 가격 경쟁력을 꼽았다. 시에먼 웨즈먼(SIPRI 연구원)을 인용해 몇 년 안에 한국이 세계 5위 무기수출국이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오는 17일부터 22일까지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서울 항공우주·방위산업 전시회(서울 ADEX)는 K방산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자리로 손색이 없다. 방산업체 관계자는 “외국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가격 경쟁력과 신속한 납품 등 K방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아졌다는 게 느껴진다”고 귀띔했다.
K방산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당장 꼽히는 건 금융지원 한도 문제다. 방산업계 등에 따르면 한국과 폴란드는 지난해 124억 달러(약 17조원) 규모 1차계약에 이어 올해 2차계약을 통해 K-2 820대, K-9 600문 등 초대형 계약을 추진했지만 현행 한국수출입은행법에 따른 수출금융지원 한도가 약 7조원으로 한도가 거의 차는 바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군 관계자는 “수출입은행법 한도를 늘리는 법 개정안 통과가 늦어지다보니 궁여지책으로 일단 예정했던 물량을 ‘쪼개기’해서 K-2 180대, K-9 160문을 먼저 2차계약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라고 말했다.
주요 방산수출국들이 한국을 경쟁상대로 여기며 견제를 강화하기 시작한 것 역시 위협요소다. 신종우(국방안보포럼 사무국장)는 “전통적인 방산강국들이 K방산에 경쟁하기 위해 개발한 무기체계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면서 “독일 방산업체 대표가 한국을 거론하며 ‘유럽이 단결해야 한다’고 말한 걸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튀르키예에 파격적인 기술이전으로 K-9을 수출했는데 이제는 튀르키예가 K-9을 바탕으로 개발한 ‘퍼티나’ 자주포로 루마니아 입찰전에 우리 경쟁상대로 나섰다”면서 “우리가 후발주자라는 이유로 기존에 판로 확대만 중시해 ‘파격적인 기술 이전’ 등 불리한 조건으로 수출하던 관행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KF-21 ‘보라매’ 전투기 공동개발국인 인도네시아의 미납금 문제도 반면교사로 꼽힌다. 방사청은 “인도네시아도 우리와 사업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해명하지만 1조원 가까운 미납금에도 우리 정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인도네시아는 동남아 방산 수출을 위한 교두보라서 정부로선 인도네시아를 어르고 달래가며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고 말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2015년부터 2026년까지 8조 1000억원에 이르는 사업비를 공동 부담해 전투기를 공동 개발하는 KF-21(인도네시아명 IF-X)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2016년 1월 KF-21 개발비의 20%인 약 1조 7000억원(이후 약 1조 6245억원으로 감액)을 2026년 6월까지 부담하는 대신 시제기 1대와 각종 기술 자료를 이전 받고, 전투기 48대를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생산하기로 했다. 국방부가 정성호(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계획대로라면 지금까지 1조 2694억원 상당의 분담금을 내야 했지만 실제로는 2783억원만 납부해 2023년 9월 현재 9911억원을 미납 중이다. 2019년 1월까지 2272억원만 납부한 뒤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4년 가까이 분담금을 납부하지 않다가 지난해 11월 94억원, 올해 2월 약 417억원을 추가 납부하는데 그쳤다. |
실질적인 민관협의가 아쉽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경운(한국전략문제연구소 전문연구위원)은 “방산업계에선 고위급 협의체와 별개로 속내를 털어놓고 토론할 수 있는 실무자급 대화 창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면서 “계약이 성사된 뒤 사진 찍으러 고위직이 방문하는 것보다 수출 대상국의 무기체계 평가 때 정부나 군 관계자가 동행해주는 게 업계에 훨씬 더 힘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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