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횡사해/여행기

실크로드, 사람이 오가고 머물며 흔적을 남겼다

by 자작나무숲 2022. 7. 31.

키르기스스탄 여행기(2) 송쿨에서 타쉬라밧까지 250km, 타쉬라밧에서 코쇼이코르곤까지 60km.

송쿨을 뒤로 하고 일행을 태운 차는 초원을 달린다. 길 양옆으로 한가하게 햇볕을 즐기는 말떼와 소떼, 양떼가 보였다. 야크떼도 눈에 띄었다. 중간 중간 고갯마루에 차를 세우고 하늘과 맞닿은 산줄기에 감탄하며 타쉬라밧(Таш-рабат)으로 향했다. 송쿨에서 타쉬라밧까진 얼추 250km를 달려야 한다. 해발고도는 점점 더 높아지지만 전반적으로 완만한 덕분에 고산병 걱정은 한결 덜었다.

키르기스스탄은 유라시아 동서를 잇는 교통로, 실크로드에 위치해 있다. 수많은 군대와 상인, 여행가들이 이 길을 지났다. 나가사와 카즈토시(長澤和俊, 1991: 40)는 “쿠차(현 중국 위구르자치구) 서방의 악스로부터 베델嶺으로 천산산맥을 넘으면, 이시크쿨 주위를 지나 토크마크(碎葉 Suyab)에 달하고, 여기로부터 서방으로 탈라스, 침켄트를 거쳐 타슈켄트에 달하는 길”을 언급하며 “오래전부터 소그드인에게 이용된 중요한 실크로드의 한 分枝였다”고 소개했다.

7세기 인도로 멀고 먼 유학길에 올랐던 현장법사가 이식쿨을 거쳐 타슈켄트로 지나간 기록을 <대당서역기>에 남겼다. 8세기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 전투를 위해 행군하던 길 역시 현장법사가 밟은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3세기 프랑스 수도사 루브룩은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몽골제국 멍케카간을 방문했다. 그리고 21세기엔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키르기스스탄을 횡단하며 겪었던 즐거운 추억을 <나는 걷는다>에서 소상히 밝혔다.


그렇지만 키르기스스탄에서 살았거나 이 땅을 거쳐갔던 사람들이 수놓았던 빛나는 역사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은 대목이 많다. 키르기스 사람들의 연원조차 명확하지 않다. 키르기스’라는 집단 자체는 중앙유라시아 고대사부터 등장하지만 사실 그 집단과 현재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이 어떤 관계인진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역사 스토리텔링 차원에서 최근 탈라스 지역에 ‘탈라스 전투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식까지 개최했던 추 대표는 “키르기스스탄 역사를 물어보면 이 곳 학자들조차 명확하게 대답을 못한다”며 답답해 했다.

키르기스스탄이 동서교류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건 751년에 당나라와 아바스 사이에 벌어졌던 탈라스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유라시아 동서교통로를 차지하기 위한 대규모 전투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패배하면서 당나라의 제지기술이 아랍으로 전해졌다는 건 세계사를 바꾼 한 장면으로 지금도 유명하다.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위치에 대해선 대체로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이 서로 자기 나라에 있는 탈라스(Tалас)타라즈(Тараз)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탈라스라는 이름의 강이 두 나라에 걸쳐 흐르는데다 맞닿아 있는 지역을 근대 이후 생긴 국경선에 따라 전투 장소를 칼로 무 베듯 구분한다는 건 큰 의미가 없을 듯 하다. 무엇보다 고선지가 이끌던 당나라 군대와 이슬람세력 사이에 벌어진 전투가 워낙 대규모였다는 걸 고려하면 두 지역 모두 전투구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이라고 부르는 이 땅이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잠깐 거쳐가는 의미만 갖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이 땅에 터잡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다양한 형태로 흔적을 남겼다. 이식쿨 인근 추 강에 위치한 발라사군은 7세기 서돌궐 제국의 수도였고(밀워드, 2013: 100), 그 뒤엔 여진에 쫓겨난 거란이 세운 카라키타이 역시 이 곳을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토크마크(Токмок) 부근은 지금도 중국 문학사에 빛나는 이태백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태백의 아버지는 국제무역에 종사했다고 하는데 소그드인일 가능성이 높다.

돌로 만든 타쉬라밧, 흙더미로 남은 코쇼이 코르곤


7월 키르기스스탄은 무척 덥다. 그래도 건조한 날씨 때문에 햇볕만 피하면 선선한 게 천만 다행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수평으로 길게 뻗은 초원과 수직으로 올라선 산줄기인 길을 여러 시간 달린 끝에 양옆으로 뾰족뾰족한 바위산을 낀 협곡으로 들어섰다. 한참을 달리자 산 중턱으로 돌로 쌓은 독특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네모 반듯하게 성벽같은 담벼락을 만들고 그 가운데 동그랗게 돔 모양으로 솟아 있다. 가로 35m, 세로 43m이고 성채의 두께는 약 2.5m라고 한다. 문으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대칭을 이룬 방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한가운데에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천장 중간 중간에 구멍을 뚫어놔 햇빛이 비치는 덕분에 아주 어둡지는 않지만 창문이 없어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답답한 느낌이다.


15세기이 이 일대를 지배하던 무하메드 칸이 카자흐스탄 동남부 세미레치에와 중국 카시가르를 연결하는 무역 통로에 만든 숙소라고 하는데, 낙타나 말을 쉬게 할 수 있는 공간이나 값비싼 교역품을 따로 보관할 장소도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해발 3530m에 위치한 이 곳은 무역상들이 드나들기에 좋은 길목이라고 보기도 힘들다(장준희, 2012: 388~391). 역시 일부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네스토리우스교나 조로아스터교 수도원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짐작을 해본다.

교류를 보여주는 돌로 만든 유적이 타쉬라밧이라면, 거주를 보여주는 흙더미로 남은 유적이 코쇼이 코르곤(Кошой-Коргон)이다. 타쉬라밧에서 50km 가량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카라수(Кара-Суу) 마을이 나온다. 카라는 검다는 뜻이고, 수는 물을 뜻하니까 직역하면 ‘검은 물’이 된다. 이 마을 옆에 있는 오래된 고대 성곽도시 유적이 코쇼이 코르곤이다.

코쇼이 코르곤 바로 옆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있다. 이 지역 출신 독지가가 기증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코쇼이 코르곤에서 발굴한 유물과 옛 생활풍습을 짐작할 수 있는 사진 정도여서 코쇼이 코르곤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설명은 모두 러시아어와 키르기스어로 돼 있다. 그나마 코쇼이 코르곤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모형이 있어서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대체로 정사각형 모양이고 중간 중간 망루를 설치했다.

코쇼이 코르곤으로 들어갔다. 9세기 쌓은 토성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흙벽만 남아 있어서 황량한 느낌만 물씬 난다. 건물 하나 없이 흙무더기 뿐이니 일행들은 5분도 안돼 흥미를 잃어 버렸는지 사진 몇 장 찍고는 더위를 피해 버스로 들어가 버렸다. 추 대표가 배정한 시간도 15분 남짓이다. 추 대표에게 애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벽을 한 바퀴 돌아보면 안될까요.” 추 대표는 “15분 정도 걸릴텐데” 한다. “그럼 얼른 갔다오면 되겠네요.”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성벽 일주를 시작했다.

박물관에서 봤던 성벽 모형을 상상하며 성벽을 따라 걸었다. 타슈켄트와 카슈가르를 연결하는 도로에 위치해 있다. 눈덮인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덕분에 초원도 풍성하고 농사짓기에도 좋아 보인다. 교통과 생산력을 담보할 수 있는 넓은 땅 한 가운데를 차지한 도시가 들어서고, 그 도시를 지키는 거대한 성벽이 솟아있으니 주변 수천리에 번영과 부유함으로 이름을 알렸겠지.

 


낙타 등마다 교역품을 가득 실은 무역상들이 성문을 드나들고 중앙시장에선 온갖 물건을 거래하는 목소리로 귀가 먹먹하다. 무역상들을 위한 객주에선 낙타에 먹일 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해가 지면 오랜 여행에 지쳐 술 생각 간절한 무역상들을 위해 술집마다 불을 밝히고, 무희들의 춤사위와 악사들의 음악소리가 눈과 귀를 간지럽힌다.

성벽을 4분의3 가량 왔을 때 성문 쪽에서 일행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달리기를 하다시피 해서 겨우 성벽 완주를 했다. 나중에 시계를 보니 대략 20분 넘게 걸렸다. 나 때문에 지체된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버스는 내가 타자 마자 곧바로 카라수 마을로 출발했다. 추 대표는 코쇼이 코르곤 성벽을 한 바퀴 온전히 걷겠다고 나서는 한국인 방문객은 자기 말고는 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충분히 즐거웠다. 머릿속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호강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전체 여행경로는 여기를 참조.

참고문헌>

나가사와 카즈토시, 민병훈 옮김. 1991, <동서문화의 교류>. 민족문화사.
베르나르 올리비에, 고정아 옮김. 2003. <나는 걷는다 3권 -스텝에 부는 바람>. 효형출판.
장준희. 2012. <문명의 실크로드를 걷다>, 청아출판사.
정재훈. 2016. <돌궐 유목제국사>. 사계절.
정효정. 2016. <당신에게 실크로드>. 꿈의지도.
제임스 A. 밀워드, 2013. <신장의 역사>. 사계절.
플라노 드 카르피니&윌리엄 루브룩, 김호동 옮김. 2015. <몽골제국기행>. 까치.
키르기스스탄 여행기

1. 
별 쏟아지는 호수에서 당나귀 탄 꼬마를 만나다
2. 실크로드, 사람이 오가고 머물며 흔적을 남겼다
3. 
키르기스 사람과 친해지기, 마술주문 하나로 충분하다
4. 
꽃과 분수가 있으니 파라다이스가 멀지 않더라
5. 
하늘과 맞닿은 산 오르다 보면
6. 
수천년전 키르기스 사람들의 일기장을 엿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