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다. 지인들이 8월 31일 설악산에 같이 가자고 하니 얼씨구나 해서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가 가는 곳이 설악산 공룡능선이길래 그런가보다 했다. 13시간짜리 산행이니 지금껏 겪어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오래 산을 걸어본건, 그것도 오르락 내리막 뽕을 뽑는 산행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말 그대로 해뜰녁에 출발해서 컴컴해질 때가지 걷고 또 걸었다. 그만큼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특히 설악산에서 바라본 동해는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꼭 추천해주고 싶은 멋진 경험, 그런거 없다. 결코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 그래놓고는 나는 다음에 또 가고 싶은 곳이 공룡능선이다.
아침 7시에 출발했다. 전날 저녁에 8km를 걸어서 도착한 백담사에서 하룻밤 잔 덕분에 곧바로 설악산 속으로 들어갔다. 백담사를 나서 산행을 시작하려는데 눈길을 사로잡는게 있다. 조약돌로 저마다 아기자기하게 쌓아올린 자그마한 돌탑이 수백개인지 수천개인지 모르겠다. 비 한 번 크게 내리면 쓸려내려가 흔적도 없어지겠지만 그게 뭐가 대수랴.
저마다 소원을 담아, 혹은 그저 재미로 쌓아올린게 자연 미술품이 됐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지극히 한국인다운 습관이 아닐까 싶다. 몽골에도 '오보' 혹은 '어워'라고 하는 돌탑을 흔히 볼 수 있지만 한국인들처럼 제각각 돌탑을 쌓는 방식은 아니다. 하여간 특이한 사람들인건 분명하다.
슬슬 예열을 하며 올라가다보니 오세암이 나온다. 누가 절집 아니랄까봐 신축건물 짓는 공사를 하느라 골재며 목재가 어지러이 난장판이다. 모양새를 보니 헬리콥터로 자재를 공수해온 듯 하다. 그래도 절집을 미워할 수 없는 건 산과 이어지는 처마의 선과 단청이리라. 게다가 날씨는 맑고 햇살은 찬란하다.
본격적인 오르막길이다. 숨이 턱에 닿으며 오르고 올라서 마등령에 닿았다. 이 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니 기분이 상쾌하다. 하지만 미처 몰랐다. 산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과 가을의 경계다. 구름이 적당히 있어서 햇살이 너무 따갑지 않다. 그러면서도 흐리지 않고 바람도 적당하니 산행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산 곳곳에 자그마한 들꽃이 피어있어 발길을 사로잡는다.
설악산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흔들바위, 대학교 1학년때 수련회로 금강굴, 대학원 첫 해 극기수업 해서 세 번 가봤다. 그 중에 대학원에서 갔던건 대청봉까지 올라갔다가 천불동으로 내려오는 1박2일 일정이었다. 이름에 '악'이 들어가면 험한 산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공룡능선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저 산이려니, 걷고 걷다보면 봉우리도 나오고 능선도 나오려니 생각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고백하겠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공룡능선은 말그대로 난이도 최상급이었다. 조금 내려갔다가 한참 올라갔다가 하길 수십번은 되풀이했다. 숨쉬느라 바쁜 코와 입을 고문하는 와중에도 들꽃과 풍광에 눈은 즐겁다. 잠깐 잠깐 쉬는 시간에 마시는 물은 꿀맛이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고나 할까. 공룡능선을 지나고 나니 천불동이다.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에 뭉친 다리가 조금씩 풀리는 기분이다. 근데 내리막길이 너무 길다는게 또 함정이다.
13시간이나 걸린 산행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서울에 돌아오니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다. 군대에서 행군하던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은 고행이었지만 설악산 기암괴석과 풍광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리 힘든 산행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음에 언제 다시 가볼까 궁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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