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재뒷얘기

'킹덤' 좀비 물리친 전술, 이 칼끝에서 나왔소

by betulo 2021. 2. 11.
728x90

국내 첫 무예사 박사 1호, 최형국 박사

 그의 일과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아침이면 경기 수원시 화성행궁에 있는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으로 출근한다. 단원들과 함께 무예24기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상설공연과 연습으로 구슬땀을 흘린다. 단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시범단 한켠에 있는 연구실에서 공부를 한다. 코로나19 이후 상설공연을 못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최근 1년은 거의 낮에는 수련, 밤에는 공부로 더 단순해졌다.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 상임연출을 맡고 있는 최형국 박사는 국내 최초로 무예사를 전공한 연구자다. 조선시대 기병전술이나 군사제도, 무예수련 방식 등을 단순히 옛 자료를 읽고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수련하는 과정을 통해 의미를 탐구했다. 그렇게 “몸과 머리로 하는 공부”를 바탕으로 조선 시대 무예교본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완역했다. 기존 번역본이 없는건 아니지만 무예수련과 역사연구 양쪽을 아는 사람이 낸 번역서는 처음이다. 최 박사는 “4년 가량 걸려 작업한 끝에 다음달 민속원 출판사에서 나온다. 1000쪽이 넘기 때문에 비상시 무기로도 쓸 수 있다”며 웃었다.  


 얼핏 봐선 최 박사는 몸 쓰는 쪽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키가 큰 것도 아니고 군대는 체중 미달로 공익근무를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일단 활과 화살, 칼까지 차고 조선시대 무인복장으로 나타나면 눈빛이 달라진다. 검도 시범을 보여줄때는 동작이 너무 재빨라서 방금 뭐가 지나갔나 싶을 정도다. 1994년부터 시작해 벌써 20년을 바라보는 무예24기 수련의 첫 계기는 “몸에 대한 관심”이었다고 한다. 


 최 박사는 “대학에 입학해서 탈춤 동아리에 가입했다. 탈춤과 풍물을 배우면서 전통적인 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통문화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다 무예24기를 접하면서 ‘아 저런 식으로 몸을 쓰는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는 대학마다 무예24기를 배우는 동아리 ‘경당’이 활발했다. 그렇게 시작한 무예24기는 1997년엔 정식 사범심사까지 통과할 정도로 삶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무예24기는 규장각 검서관인 이덕무·박제가, 장용영(壯勇營) 장교였던 백동수 등이 정조 임금의 명으로 1790년 펴낸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도검 10기, 창·봉 7기, 마상(馬上)무예 6기, 권법 1기 등 24가지 무예를 가리킨다. 무예도보통지는 도(刀), 검(劍), 창(槍), 곤(棍) 등의 병장기와 권법(拳法) 등 각종 무예[武藝]를 그림과 해설로 설명[圖譜]한 종합교본[通志]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최 박사는 “무예24기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단병접전 능력에 고전하면서 얻은 뼈저린 교훈을 바탕으로 한 무예”라면서 “예도(조선세법), 본국검 등 전통 무예에 더해 일본 무예인 왜검(토유류, 천유류, 운광류), 명나라 군대를 통해 들어온 중국 무예인 낭선과 등패 등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거기다 전통적으로 중시한 마상무예인 기창(騎槍), 마상쌍검, 마상월도,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까지 포함시킨 종합무예라고 할 수 있다. 무예24기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맥이 끊겼다가 군사정권 시절 시국사건으로 수감중이던 임동주씨가 무예도보통지를 독학으로 익힌 뒤 전파한 ‘복원무예’다.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무예24기가 삶의 일부가 된 두번째 계기는 1999년 경기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정조 시대 전통무예전’이었다. 최 박사는 “당시 무예24기 연출을 맡으면서 택견 전수자, 마상무예 시범단과 국방부 의장대 등과 함께 준비했다”면서 “수원화성이라는 공간과 가장 어울리는 게 무예24기라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마침 2003년 화성행궁 복원이 끝나면서 화성에 주둔하던 상비군이었던 장용영 군사들이 익혔던 무예를 공연으로 해보자는 제안을 수원시에서 받았다”면서 “그걸 계기로 무예24기 상설공연을 시작했다. 


 무예24기시범단이 자리를 잡는데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최 박사는 “초기만 해도 주말에만 시범공연을 하면서 월급이 30~40만원 정도밖에 안됐다. 2004년부터 매일 공연하면서 급여가 올랐지만 100만원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면서 “다행히 2015년에 시립예술단 소속으로 바뀌면서 안정된 여건을 갖게 됐다”고 소개했다. 


 몸을 통한 수련을 계속하면서 계속 고민했던 건 “무예를 하면서 생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였다고 한다. 그는 “1997년에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수원화성이라는 그릇에 무예라는 콘텐츠를 집어넣으면 새로운 문화관광 콘텐츠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대학원에서 가서 ‘전통무예를 활용한 관광마케팅’을 주제로 2003년에 석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케팅만으론 갈증이 풀리지 않았다. 최 박사는 “무예가 근원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흘러왔는가, 조선시대에 실제 어떻게 무예를 익혔는지 공부를 해야한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결국 2년간 준비한 끝에 2005년 중앙대 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부터 목표로 했던 건 조선시대 기병전술이었다. 그는 “무예24기를 하면서도 마상무예는 제대로 익히기가 힘들었다. 당장 말타기부터 쉽지 않았다”면서 “결국 빚을 내 승마장 회원권을 구입해 말타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몽골에도 두 번 다녀왔다. 보름 가량 말타고 활쏘기 연습만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물이 2011년 박사학위를 받은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였다. 


 ‘몸’을 모르면서 나오는 해석 오류 적잖아


 역사연구와 무예수련을 병행하면서 그는 군사와 관련한 기존 해석에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서 21세기보다도 더 우수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최 박사는 왼손잡이 관련 내용을 들었다. 


 “조선시대 무과 시험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게 기사(騎射), 즉 말타고 활쏘기입니다. 좌우로 짚단을 5개씩 세운 다음 말을 타고 돌진하면서 좌우 번갈아가면서 쏘는 방식이죠.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좌집궁자우사(左執弓者右射), 우집궁자좌사(右執弓者左射)’란 표현이 나옵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쪽으로 쏘고, 오른손잡이는 왼쪽으로 쏘라는 뜻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 군대는 왼손잡이라 하더라도 억지로 오른손잡이와 똑같은 자세로 총검술을 가르치지만 조선시대 군대는 왼손잡이에게 억지로 오른손잡이와 똑같이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최 박사는 “활을 쏠 때 엄지에 끼우는 깍지만 해도 왼손잡이용이 따로 있었다. 가령 철종을 그린 초상화(어진)를 보면 왼손 엄지에 깍지를 낀 모습이다. 철종이 왼손잡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왼손잡이 대접만 놓고 보면 조선시대가 현대보다 더 선진군대였다”고 꼬집었다. 


 일단 오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드라마나 영화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고증 오류를 바로잡는 걸로 이어졌다. 오류와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아예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그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진에게 자문을 해주는 활동도 많이 한다. 그는 “일부는 고증을 구색으로만 쓰거나 반영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면서 “자문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건 역시 ‘킹덤’”이라고 소개했다. 좀비물이라는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이 드라마엔 활쏘기나 총쏘기, 각종 대포류 등에서 공을 많이 들였다. 그 뒤에 최 박사가 있었다. 


 최 박사는 “조선시대에 좀비라는 적이 공격해 온다면 어디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어떤 무기로 어떻게 대응할까 상상했다”면서 “김은희 작가 등 제작진이 줄거리를 짤 때부터 고증 내용을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반영해줘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사극은 고증과 상상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게 중요하다”면서 “고증에 맞게 상상력을 발휘하면 재미가 배가되는데 상상을 위한 수단으로 고증을 이용하려 하면 안된다”고 밝혔다. 

 


 무예수련을 통해 건강한 삶과 열정을 갖게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잦은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최 박사는 “말에서 떨어지는건 보통이고, 검도 공연 도중 손을 다쳐 몇시간 동안 수술을 받은 적도 있다”면서 “부상을 통해 조선시대 무인들이 칼머리를 뒤로 해서 칼을 차는 이유를 이해하고 되는 등 부상도 공부의 한 부분”이라고 웃었다. 그는 “한마디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만하다”면서 “미쳐야 보이는게 있다. 앞으로 수십년 더 미쳐서 공부하고 수련하다보면 조선시대 무인의 삶과 군사제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2021년 2월3일자 기사. 사진출처는 서울신문 정연호 기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