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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서울시장 선거, 어쨌든 책임은 우리 몫이다

by betulo 2011.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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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나이에 따른 선거권을 갖게 된 건 1990년대 초반이었다. 하지만 실제 투표장에 가 본 건 1998년 지방자치단체선거가 처음이다. 집 근처 성당에 마련된 투표장에 갔다. 문 앞에서 쫓겨났다. 내 신분증을 선거인 명부와 대조하던 공무원은 잠시 나를 밖으로 불러내고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선거권이 없다”는 취지로 내게 말해줬다. 집행유예 기간이라는 거였다.


나는 선거 몇 개월 전 특별사면과 복권 조치를 받았다고 반박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 공무원은 “복권 사실을 주소지에 신고하지 않았다.”면서 당시 주소지였던 면사무소에서 나온 공문을 보여줬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보니 당시 주소는 서울로 돼 있었지만 사면복권 당시엔 시골에 주소지가 있었던걸까... 행정에 관한 문제는 정확히 모르겠다.)


사실 자세하기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서 1996년 국회의원선거, 1998년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못했다. 1995년 지방선거도 비슷한 상황. 이번에는 투표할 수 있겠지 하며 아침 6시에 들뜬 마음으로 투표장에 갔던 20대 중반 복학생은 결국 기분만 잡친채 학교에 갔다가 도저히 책이 눈에 들어오질 않아서 곧 짐을 싸서 집에 돌어와 버렸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미국에 있었다. 부재자 투표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또 투표를 못했다. 결국 나에게 최초 투표는 2002년 지방선거가 돼 버렸다. 20대 후반에야 처음으로 투표를 하게 됐을 때 심정은 투표일을 그냥 하루 쉬는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해 못할 ‘감동’이었다.


1994년 가을과 겨울 언저리로 기억한다. 당시 서울대에서 ‘학우들의 반란’이 벌어졌다. 무효표가 규정 이상으로 많이 나왔다. 규정상 재투표를 해야 했다. ‘찍을 사람이 없다’는 사람들, ‘찍어봐야 다 똑같더라’는 분들에게 간곡하게 권하고 싶다. 차라리 박지성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13번을 찍는 한이 있더라도 투표는 해야 한다.


‘침묵하는 다수’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그저 ‘밥먹으면 배부르다’처름 아무짝에 쓸모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건 목소리를 내는 소수다. ‘침묵하는 다수’는 ‘침묵하지 않는 소수’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오로지 ‘침묵하는 다수’가 침묵을 깨고 어떤 식으로든 ‘침묵하지 않는 다수’가 될 때만 뭔가 변화가 있다. 민주주의는 결국 ‘침묵하는 다수’에서 최대한 많은 이들을 끌어내서 ‘침묵하지 않는 다수’로 만들어내는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떤 이들은 ‘국민들은 투표일에만 민주주의를 누리고 그 다음 투표일이 있는 몇 년 동안 노예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말은 투표일에도 노예가 돼서 백년만년 노예가 되라고 권하는 말이 아니다. 대표를 뽑은 사람들이 노예가 될지 주인이 될지는 그 다음 문제다. 일단 하루라도 주인이 되고 다음 투표일까지도 계속해서 주인이 되도록 노력하는게 중요하다.


1992년 겨울 대통령선거 다음날 한겨레신문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렸던 기억이 난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대표를 갖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민주주의를 갖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많이 공감이 간다. 만약 당신이 후보가 마음에 도저히 안들어서 투표를 안하는건 어디까지나 당신 자유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우리가 그토록 욕하는 정치인들, 바로 우리가 뽑아준 후보였다. 어떤 나라 모 대통령 가카가 하는 게 눈뜨고는 못봐주겠다며 ‘꼼수’ 어쩌고 하는 방송 들으며 피해자 의식을 공유하는 우리들. 그 대통령 뽑아준 건 바로 우리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때 또 다른 가카 뽑지 말란 보장 없다. 


이 글은 인권연대(http://www.hrights.or.kr)에 기고한 글입니다. (무보수 기고니까 딴지 걸지 마삼.)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함께 투표를 했다. 인증샷도 날린다. 선관위(로 쓰고 모 후보 선본 2중대라 읽는다)야 나 잡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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