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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유토피아도 양로원도 아닌

雜說

by betulo 2011. 7. 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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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위해 5월 하순부터 7월 초까지 6주 동안 해외를 다녀왔다. 그 중 4주일 가량을 유럽에서 보냈다. 유럽은 뭐랄까. 수백년에 걸쳐 구축해 놓은 우수한 제도의 힘이 시스템으로 구현되는 모습에 감탄하고, 여유있는 생활태도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전엔 결코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유럽의 한계도 눈에 들어왔다. 19세기 전부터 이어져 오던 계급구조가 지금도 소리 소문없이 자연스럽게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에 경악하고, ‘교육없는 복지가 그 똬리를 강화시키는 것에 충격받았다.

존경하는 한 학자가 일전에 한 칼럼에서 이런 얘길 쓴 걸 본 적이 있다. 민주주의를 뼛 속 깊이 체화한 한 노르웨이인 교수가 한국에 가서는 일반적인 한국 교수들과 똑같이 권위주의자로 변해 버리는 걸 봤다. 그 이유는 뭘까. 민주주의를 기득권으로 누리는 것과, 구현해야 할 사상체계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아닐까.

유럽인들이 기득권처럼 누리는 민주주의가 이주노동자나 무슬림 이민자들에게도 태어날때부터 누구나 갖고 있는민주주의일지 어줍잖게 판단할 능력은 없다. 물론 한국의 현실과 비교한다면 지나친 비판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유럽을 유토피아처럼 느끼는 것은 또다른 편향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중앙도서관


가령 독일은 교육공공성으로 보나 학문수준으로 보나 세계 최고 수준으로 부러움을 사는 곳이다. 하지만, 독일 교육의 그림자는 없을까? 세계적인 수준과 사실상 무상에 가까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대학은 있는 집 자제가 가는 곳일 뿐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독일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다. 그걸 잘 아는 이민자 가정 등 하층계급 출신들이 교육을 통한 계급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OECD 보고서에서도 독일은 사회계층에 따른 학교 성적 차이가 가장 상관관계가 높은 국가로 나타난다.

독일은 초등학교 4년을 마치고 나면 김나지움, 레알슐레. 합트슐레 등 세 종류 학교로 진학한다. 여기서 인생 경로가 어느 정도 정해진다고 할 수 있다. 불필요한 경쟁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적성을 찾아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상류층 자녀들은 김나지움으로 몰리고 이들은 곧바로 대학에 가는 반면, 이민자 자녀들 대부분이 일종의 실업계 학교인 합트슐레로 몰리면서 합트슐레가 슬럼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합트슐레는 특히 직업교육을 하는 곳이 줄어들면서 졸업생들이 곧바로 청년실업자로 전락하고 있어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 정도가 학교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대학진학률과 직업선택을 좌우하면서 계급구조를 더욱 고착시키는 양상이다. 한마디로 복지제도는 잘 갖춰져 있지만 독일의 복지는 교육 없는 복지. 이것이 사회통합을 해치고 양극화를 심화시켜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영국은 또 어떤가. 폭동에 가까운 학생 시위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는 격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책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영국 대학 등록금은 한 순간에 3배가 오르게 됐다. 내년 9월 신입생부터는 연간 9000 파운드(1620만원)까지 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지난 1월에는 부가가치세를 17.5%에서 20%로 인상했고, 대중교통 요금도 최근 20% 가까이 올렸다.

교육 양극화에서도 영국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영국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약 2500여개에 이르는 사립학교가 있다. 재학생은 약 62만명이나 된다. 통학생 학비가 연간 평균 4141파운드, 기숙사에서 생활할 경우엔 7334파운드나 된다. 심지어 이튼스쿨같은 곳은 25859파운드로 우리돈으로 1년에 5000만원이 넘는다. 사립학교 졸업생의 92~95%가 대학에 진학한다. 상위 5개 사립 고등학교 학생의 41%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로 직행한다. 영국에선 개천에서 용도 안쓰는사회가 된지 오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틀린 적이 한 번도 없다. 개혁을 주제로 뭔가를 논의할 때 항상 우리는 유럽은 어떻게 하나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유럽이라는 담론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취사선택되거나, 심하게 말하면 아전인수되는 곳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물안 개구리가 되자거나, ‘우리는 우리 길을 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외국의 좋은 사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사례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이면에 있는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것 없이 외국은 어떻게 하는데...’라고 하는 것은 자칫 선무당 사람잡는 결과만 초래하지나 않을까 싶다.

미국이라는 맥락에서 고민 끝에 나온 입학사정관제도가 한국에서 교육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나, 유럽 맥락에서 복지재정을 효율화하는 조치만 보면 그것 보라며 입에 거품을 무는 일부 인사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우리는 띄엄띄엄 아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www.ingopress.com)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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