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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송두율 교수 사건

송두율 교수 2심 결심공판 열려 (2004.6.30)

by betulo 2007.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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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2심 결심공판 열려
[송두율] 박형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방청 눈길
송 교수, “역사가 국보법을 유죄로 기록할 것”
2004/6/30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송두율 교수 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이 3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송 교수는 최후진술을 통해 국가보안법 철폐의 당위성과 남북통일의 시대사적 의의를 조목조목 밝혔다. 특히 이 자리에는 박형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처음으로 재판과 최후진술을 방청해 눈길을 끌었다. 검찰은 1심과 같은 징역15년을 구형했다.

 

박 이사장은 “그동안 재판을 보기 위해 오려고 했지만 혹시라도 송 교수에게 피해가 갈까봐 오지 못했다”며 “그래도 최후진술은 들어야 나 자신에게 떳떳할 것 같아 직접 재판정에 왔다”고 밝혔다. “그동안 재판을 방청한 직원들을 통해 재판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는 박 이사장은 “이번 재판이 국민들만 쓸데없이 불안케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기념사업회도 송 교수의 고통을 통해 스스로 존재이유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송두율 대책위는 결심공판이 열리기전 고등법원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왼쪽부
                터 독일 슐츠 변호사, 정정희씨, 김세균 서울대 교수.

 

박 이사장은 “재판과정 내내 주심판사 얼굴만 쳐다봤는데 주심판사가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며 “판사로서 양심이 있다면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성명서를 내는 것과 같은 직접 대응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가기관이라는 한계를 이해해달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송병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술연구부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히자는 의견이 많다”며 “직장협의회 차원에서 공식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정에서 송 교수 부인 정정희씨와 함께 앉은 박 이사장은 송 교수가 양복 차림으로 입장하자 “예전에는 죄수복에 수갑을 차고 나왔다”고 알려주며 “형식적 민주주의는 갖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최후진술에서 “나의 입국 이후 시작된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국가보안법이 어떻게 자기최면제 기능을 하는지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며 “국가보안법은 이 법에 의해 지켜질 수 있다고 믿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이 법에 의해 무자비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모순조차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최면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역사는 나의 무죄와 함께 국가보안법의 마지막 시간을 반드시 그리고 분명하게 기록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왼쪽 사진 설명: 결심공판이 열리기 전 법원 정문앞에서 송두율 교수 석방을 위한 청년학생 모임 회원이 송두율 교수 무죄석방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구속 수감된지 9개월에 이른 송 교수는 그동안 겪은 마음고생을 “한 평의 공간에 갇혀 있으면서 솟구치는 분노와 형용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을 억누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아직도 철폐하지 못하는 이 사회의 개혁역량에 대해서도 가끔 의구심을 갖게 된다”며 시민사회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분단극복의 과제와 연결시켰다. 그는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한반도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송 교수는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날로 복잡해지는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가 될 거시냐는 문제”라며 “이는 분단한반도가 안고 있는 ‘중심의 괴로움’을 ‘동북아 희망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결심공판이 끝나고 재판을 방청한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정희 여사, 김세균
                서울대 교수, 오종렬 전국연합 의장, 함세웅 신부 등이 보인다.

 

송 교수는 “논어의 술이편에는 네모의 한 모서리 문제를 풀 능력을 키우면 다른 세 모서리 문제도 자연히 풀 수 있다는 뜻에서 계발(啓發)이라는 말이 있다”며 “이번 재판의 결과가 남남갈등, 남북갈등 나아가 동북아갈등이라는 다른 세 모서리의 문제를 깨우치는 ‘계발’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국가보안법도 이번 재판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사지리라 믿는다”고 말할 때는 감정이 복받친 듯 울먹이기도 했다.

 

이날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송두율 교수에게 1심과 같은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검찰은 최종의견에서 “피고인 송두율은 죄질이 나쁘고 개전의 정이 없어 징역 7년은 너무 가볍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1심과 같은 징역 15년을 선고해달라”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송두율교수 항소심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국내외의 커다란 관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항소심을 맡아보신 재판부의 노고에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항소심의 선고를 앞두고 저의 진솔한 심경을 담은 마지막 진술을 역사 앞에 남기려고 합니다.

 

작년 9월 22일, 3주일을 예견하고 가족과 함께 37년 만에 서울 땅을 밟았던 그때로부터 만9개월이 넘었습니다. 귀국 다음날부터 시작된 <국정원>과 이에 이은 <검찰>의 조사를 거쳐 10월22일 밤늦게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이미 가을, 겨울, 봄을 보내고 여름 장마철을 맞고 있습니다.

 

“조국은 구두밑창처럼 아무 곳이나 끌고 다닐 수 없다”는 프랑스 혁명의 비극적인 주인공 당통(Danton)의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 없는 조국 땅을 37년 만에 찾았다가 지금까지 정말 기막힌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한 평의 공간에 갇혀있으면서 솟구치는 분노와 형용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을 억누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학술토론회의 주제가 되었더라면 오히려 좋았을 내용이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으로서 법정에서 왈가왈부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서는 민족분단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생활세계가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악법도 법이다”라고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라고 욱박지르는 이 나라의 이른바 <중견 언론인>의 주장도 저의 귀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악법을 법으로서 인정한 패배자의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시대인에게 진정한 법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성찰(phronesis)케한 분명한 승리자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존재이유(raison d"tre)에 대해서 조금만 고민한다면 <국가보안법>을 소크라테스의 행위동기에 견강부회(牽强附會)식으로 가져다 부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든 저의 입국 이후로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 법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최면제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저는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법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고 믿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이 법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모순조차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자기 최면제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둘러 싼 건강한 시민사회의 올바른 담론형성은 머지않아 그러한 비정상적인 현실을 반드시 교정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와 동시에 반 유신투쟁, 광주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에 뿌리를 둔 이러한 담론 형성에 외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제가 어렵사리 37년 만에 귀국,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사명을 직접 떠 맞게 된 역설에서도 많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아울러 89년 가을,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지구상 유일의 분단민족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하고 고뇌하면서 쓴 글들의 내용조차 문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아직까지도 철폐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 사회의 개혁적 역량에 대해서도 가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역사의 의미에 대한 회의가 휩쓸고 있는 것이 오늘 날의 시대적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우리 모두의 삶을 지금보다는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저는 외국 땅에서도 열심히 그러한 길을 모색해보고, 또 실천의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지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진정으로 고민해야할 문제는 날로 복잡해지는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이냐 라는 문제입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분단 한반도가 오늘 안고 있는 <중심의 괴로움>을 동북아의 <희망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동북아의 집>이니 <동북아 허브>와 같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구상도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회문화적인 통합내용이 빠진 구상들은 많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나 일본의 <과거청산문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개별민족의 역사를 현재화하는 갈등이 특히 동북아에 있어서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한반도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남북의 상생과 평화를 구현시키는 그러한 아름다운 통일은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 나아가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의 미래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扁)>에는 사각형의 한 모서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나머지 세모서리의 문제도 자연히 풀 수 있다는 뜻에서 계발(啓發)이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재판의 결과가 남남갈등, 남북갈등 나아가 동북아 갈등이라는 다른 세 모서리의 문제를 깨우치는 <계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저는 바랍니다.

 

지난 반세기 넘게 정말로 유치한 상호비방 방송이 휴전선에서 멈춘 것처럼 저는 <국가보안법>도 이번 재판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번 항소심의 결론에 국내외에서 특별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저의 무죄와 함께 <국가보안법>의 마지막 시간을 반드시 그리고 분명하게 기록하리라고 믿습니다.

끝으로 오랜 외국생활에 시달리는 제 영혼의 외로움을 멀리서 달래 주었던 제주의 그 검푸른 바다와 광주의 그 뜨거운 대지와의 재회를 간절히 바라며 재판부가 보여주신 노고에 거듭 경의를 표시하면서 저의 마지막 진술을 이것으로 간단하게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04년 6월 30일

                                                           송 두 율

2004년 6월 30일 오전 8시 25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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