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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사/취재뒷얘기

"믿을 건 좋은 학력이 아니라 뛰어난 실력"

by 자작나무숲 2007.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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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짧게 깍은 동네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가정형편"같은 "피치못할 사정"을 얘기할거란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리며 그는 자신이 중학교 중퇴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이 경북 영천인데요. 거기가 군부대가 많아서 놀 수 있는데가 많거든요. 놀다가 졸업을 4개월 남겨놓고 학교 그만뒀지요. 제가 3형제 중 막내여서 사랑만 받아서 더 그런 것도 있지요. 다 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부모님이 말리려고 크게 노력했어도 달라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우리 집이 못사는 집은 아녔어요."

참 솔직한 분이다 싶었다. 1981년 200만달러나 되는 위조지폐를 찾아냈음에도 표창 하나밖에 못 받았다는 말을 할 때는 많이 서운한 표정이었다. "내가 하다못해 상업고등학교라도 나왔으면 아마 상황이 엄청 날라졌겠지요."

학력이 아니라 실력만 믿고 37년 외길 인생을 걸어 지금 자리에 오른 서태석씨.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기사를 바친다.


“내세울 만한 학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학력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믿을 건 실력 뿐이라는 마음으로 37년 동안 위폐 감식 외길을 걸어왔죠.”


한국외환은행 서태석(64) 부장은 위폐 감식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다. 그는 중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지만 미 연방수사국(FBI) 등이 인정한 세계 최고 수준의 위폐 감식 능력을 지녔다.


  그는 2001년 정년 퇴임했지만 독보적인 능력 때문에 곧바로 부장급으로 재임용돼 현장에서 뛰고 있다. 2003년에는 ‘이건 가짜야!’로 유명한 외환은행 이미지 광고에 등장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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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이력서 학력난은 경북 영천중학교 중퇴가 전부다.그는 공부를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철부지 어린시절 놀러 다니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공부를 못한 것에 대해 뒤늦게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묵묵히 위폐 감식이라는 외길을 걸어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그는 1964년 논산훈련소에서 ‘줄을 잘 서는 바람에(?)’ 위폐 감식의 길을 걷게 됐다. 영어 한마디 못한 채 카투사(미국 육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로 입대해 경기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에서 경리사병을 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상관이었던 미군 경리장교로부터 위조 달러 감별하는 법을 배웠어요. 하루는 새로 전입한 미군 신병이 20달러짜리 지폐를 환전하려고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수상한 거예요. 방첩대가 조사를 했는데 결국 위조지폐로 드러났죠. 그게 제 위폐 감별 인생의 첫 걸음이 됐죠.”


  1966년에 군대를 제대했지만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일자리를 찾던 그는 이듬해 1월 외환은행 창설 소식에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당시는 외화를 취급해본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무작정 외환은행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채용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솔직히 무모했죠. 당시 외환은행 직원 태반이 고시 합격한 사람들이었어요. 인사과 직원이 학교장 추천서와 성적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퇴짜 맞고도 계속 전화했어요. 결국 1969년 경비실 소속 일용직으로 영업부 외환계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외국 동전과 지폐를 정리하고 감별하는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묵묵히 일한 끝에 실력을 인정받아 1973년 4월에 서무직 직원이 됐다. 1983년에는 일반 행원 5급 계장으로 채용됐다. 한국 금융계에서 전무후무하게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 일용직에서 시작해 일반직 간부까지 올라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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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지금도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30분 정도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8시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곧 산더미처럼 쌓이는 외국 돈이 그의 손길을 기다린다. 1분에 외환 200장을 감별하는 서 부장은 1년에 적발하는 위조 지폐가 평균 10만달러라고 한다.


  그는 지금도 1981년 200만달러 위조지폐를 적발했을 때를 잊지 못한다. 김포공항 세관에서 40만달러 뭉치 5개를 인수받던 서 부장은 뭉치를 들어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FBI 직원까지 입회하고 뭉치를 개봉해 보니 모조리 위조지폐였다. 처음엔 200만달러나 되는 위조 지폐를 보지도 않고 찾아냈다는 말을 믿지 못하던 미국 직원들도 혀를 내두른 실력이었다.


  그는 학력 때문에 차별은 없었지만 섭섭했던 적은 많았다. “누구를 만나든지 사람들은 대뜸 어느 대학 나왔느냐고 물어봅니다. 중학교 중퇴라고 대답하면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죠.”


  2004년에는 유명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요청을 받았다가 이력서를 보내주자마자 취소 통보를 받은 적도 있었다. 정부기관 강연을 했을 때 어떤 국장은 처음엔 강연 끝나고 직접 인사하겠다고 했다가 이력서를 보고는 자기 부하를 보내서 대신 인사를 시킨 적도 있다.


  “세상에 제일 더러운 게 돈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이 분야 최고가 된 건 일류 대학 나온 사람들이 하루종일 ‘세균 덩어리’ 만지는 일을 자존심 상한다며 안 맡으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죠. 막노동을 하는 사람 중에도 최고는 있습니다. 자꾸 학교만 따지고 간판만 강조하니까 학력을 위조해서라도 출세하려는 사람이 나오는 거잖아요. 어느 분야든지 자기 노력으로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 하나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2007년 8월24일자 8면 기사
사진=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사족 하나. 오랫동안 돈을 만져서인지 서태석씨는 손을 깨끗이 하려는 노력이 엄청납니다. "세상에 돈보다 더러운 게 없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우선 돈을 셀 때 절대로 침을 손에 묻히지 않습니다. 화장실에 가면 손을 먼저 씻고 용변을 봅니다. 버스나 지하철 손잡이는 왠만하면 만지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피자나 과일도 손으로 잡고 먹지 않습니다.

손만 깨끗이 씻어도 왠만한 질병은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있죠. 저도 열심히 손을 씻어야겠다 싶었습니다. ㅎㅎㅎ

댓글2

  • 짱구엄마 2007.08.24 13:34

    맨 마지막에 다짐한 말...
    기억해두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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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질랜드에서 2007.08.31 14:23

    강기자, 기사가 너무 재미있어서 눈에 쏙 들어옵니다. 학력이 승진이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건 어느 사회나 같은 것 같습니다. 여기 뉴질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졸자 보다 대졸자가 돈도 더 받고 대우도 더 좋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한국에서는 학력이 높은 사람을 우대할 뿐 만 아니라 학력이 낮은 사람을 '무시'한다는 사실이죠.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학력 위조가 판을 치는 이유는 사실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한 것 보다는 무시 당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더 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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