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는 안하지만 필요하면 검토할 것이고, 필요한지 안한지 검토할 건데 아직 결정된 게 없으니까 가정해서 묻지 말아달라.
28일 열렸던 국방부 브리핑을 한 마디로 요약해봤다. 이게 말이냐 떡이냐 싶겠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발단은 홍범도였다. 육군사관학교가 느닷없이 학교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치우겠다고 했다. 소련공산당 관련 활동을 했으니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곧바로 문제제기가 나왔다. 국방부 앞에도 홍범도 흉상이 있는데 그것도 치울거냐.
국방부 브리핑에서 이 질문을 받은 국방부 대변인은 “국방부가 현재 검토하고 있지만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공산당 입당 또는 그와 관련된 활동이 지적되고 있어서 검토하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덧붙였다. 알기 쉽게 번역해보면 “아직 결정은 안됐지만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답은 정해져 있다” 정도 되겠다.
국방부 행동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는 곧바로 이어진 다음 질문에서 곧 드러난다. 현재 해군은 1800t급 잠수함 ‘홍범도함’을 운용하고 있다. 홍범도 활동이 문제가 돼 동상을 치워야 한다면 홍범도 이름을 딴 잠수함도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인가. 국방부 대변인은 “필요하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다. 곧바로 해군 공보팀장이 “해군에선 그 문제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선을 그으면서 국방부 대변인을 뻘쭘하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함명을 변경하는 건 전세계에서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브리핑이 끝나고 해군 관계자에게 따로 물어보니 “잠수함 이름은 공식절차를 거쳐 오랜 논의 끝에 정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홍범도 논란은 홍범도함을 거쳐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전력이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남로당 핵심관계자였고, 그런 전력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은 적이 있던 전직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입장’을 묻자 국방부 대변인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내친김에 해군이 보유한 3000t급 잠수함 ‘신채호함’은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도 나왔다. 단재 신채호는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다 옥사했다. 아나키스트라니, 자유주의에 맞지 않는 분 아닌가. 역시나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방부는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것일까.
홍범도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라는 걸 모르는 한국사람은 없을 것이다. 홍범도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는데 현재까지 대통령장을 받은 사람은 20명 뿐이다. 그게 1962년이니 박정희 정부 당시다. 김대중 정부 당시인 1998년 10월에는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신형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다. 2021년 문재인 정부는 홍범도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그랬던 홍범도를 이제 와서 ‘전력에 논란이 있다’며 동상을 치워버리겠다고 하니 모두가 당황스러워한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일이긴 하다. 대통령 윤석열이 목놓아 자유를 외치며 공산적폐주의인지 공산전체주의인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개념조차 없는 신기한 말을 했을 때부터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설마 그게 홍범도일 줄은 몰랐다. 본인 스스로 친일파라고 인정했던 백선엽은 동상을 세워주고 친일파 아니라고 대신 우기더니,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홍범도는 ‘색깔이 의심스럽다’며 딱지 붙이느라 여념이 없다. 경제는 절딴나고 외교는 살얼음인데 어찌 그리 한가할 수 있는지 두려울 정도다.
우리는 흔히 과거 인물들의 행적과 사고방식, 역사적 사건을 지금 잣대로 손쉽게 재단해버리곤 한다. 물론 무조건 나쁘게 볼 건 아니다. 그때는 그랬지 하는 식으로만 뭉개는 건 역사에서 배울 태도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당대의 맥락을 무시한 채 지금 잣대만 들이대는 건 역사왜곡과 갈등에 빠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대의 맥락과 지금의 잣대 사이에서 긴장감을 놓지 않고 균형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자세라면 홍범도의 ‘논란있는 행적’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냉정하고 통찰력있게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보훈부 장관 박민식이 앞장서고 정부여당이 지원사격하느라 여념이 없는 정율성 역사공원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일하는 어떤 공무원이 용산 대통령실을 ‘용궁’으로 지칭하는 걸 듣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요즘 용궁은 한참 색칠놀이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 하지만 잊지 말자. 색칠놀이는 두세살 아이들이 할 때나 귀엽고 예뻐 보이는 법이다. 하다못해 일본은 아베같은 사람조차도 이전 정부에서 공식발표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담았던 ‘고노 담화’를 부정하지 않고 유지했다.
대한민국은 어쩌다 5년에 한번씩 ‘건국’을 하며 새 나라의 어린이로 새로 태어나는 나라가 돼 버렸다. 그런 정신으로 무장한 분들이 이끄는 용궁은 오늘도 색칠놀이에 여념이.없다. 물론 애초에 기대도 없었으니 실망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딱 한가지는 부탁하고 싶다. 색칠놀이를 하더라도 빨간색 하나만 칠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다. 빨간색 범벅 색칠한 종이는 정신 사납다.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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