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정학 책을 이것 저것 많이 읽고 있다. 예전부터 지도를 좋아했고, 국제관계 역시 관심이 많이 분야다. 두 개를 결합하는 지리정치학, 지정학은 읽는 재미가 있다. 더구나 역사를 통해 지정학을 설명하는 책이라면 도저히 피해갈 방법이 없는 마법가루나 다름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정학 책을 번역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생소한 나라와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다양한 지명, 낯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번역하려면 품이 훨씬 더 많이 들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했다. 이탈리아 기자 겸 작가가 쓴 <지도 위의 붉은 선>(페데리코 람파니 지음, 김정하 옮김, 2022, 갈라파고스)을 번역한 건 책 표지에 적힌 홍보문구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도가 말하는 사람, 국경 역사 그 운명의 선을 따라나서는 지정학 여행” 이건 정말 내 취향을 너무 정확히 맞춰버렸다. 사람 이야기, 역사와 지정학, 거기다 여행까지. 2023년 새해를 여는 책으로 이보다 더 유쾌한 선택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100쪽쯤 됐을 때는 실망감이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200쪽쯤 읽었을 때는 그만 읽을까 말까 번뇌했다. 300쪽쯤 넘길 때는 쓰레기통에 버릴까 말까 고민할 정도가 됐다. 거기다 이 책 두껍기까지 하다. 560쪽이라니. 어지간해선 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있고, 나중에는 왜 이 책이 엉터리인지 소개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가장 먼저 나를 당황하게 만든 건 몽골을 꿋꿋하게 몽고로 번역하는 것 때문이었다. 무려 20번 가까이 된다. 물론 여기까진 참고 넘어가 줄 수 있다. 뒤로 갈수록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번역 오류가 속속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령 옛 동독을 “독일민주주의공화국”으로 번역하거나 총리를 “서기장”으로, 사회민주당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번역하는 것들이다. 동독과 서독의 관계를 쓰면서 “사회민주주의정당의 당수(106쪽)” 빌리 브란트라고 하거나, “서기장 비스마르크(103쪽)”라고 표현하는 건 당황스럽다.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는 번역도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가령 미국 관련 내용에서 National은 국가가 더 나을듯 한데 민족으로 번역하는 게 그렇다. 미국 진보진영을 일컫는 ‘리버럴’이라고 하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자유주의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라고 번역하는 것을 보면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하는 글에서 언급하는 나라에 전혀 신경을 안쓰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든다. 이는 인도를 다룬 부분도 마찬가지인데, 나렌드라 모디의 경력을 언급하면서 “모디는 2001년 구자라트의 총독으로 정치인의 삶을 시작했다(177쪽)”와 “모디 자신이 우타르프라데시 주정부의 총독으로 임명하기를 원하던(182쪽)에서 꿋꿋하게 총리를 총독으로 번역하고 있다. (게다가 인도 주정부는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자리인데 "임명"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장도 곳곳에 보인다. “승객들 사이에서 심각한 상황의 침묵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137쪽)” “흙탕물 위로 익사한 쥐 사체 수백 개가 떠내려왔다(223쪽)”가 대표적이다. 상황이 이 모양에 이르고 보니 라트비아를 레트비아라 하거나(155쪽), 무함마드를 “마호메트(192쪽)”로 표기하고, “과도한 겨울철 난방에서 과도한 여름철 냉각(463쪽)”이라는 표현을 쓴다거나, 파라다이스 어원을 설명하면서 정원을 “담을 두른 공원(189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정도는 그냥 애교로 봐줄 수밖에 없다.
번역에 성의가 없으니 용어사용도 괴상해지고 앞뒤도 맞지 않는 번역이 돼 버린다. 다음 문장을 보자. “전쟁이 발발하자 연방 측에서는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가 추가로 가담했다. 트럼프 선거의 붉은 선은 과거에 노예제를 인정했던 남부 연방의 모든 주들을 포함한다(357쪽).” 번역자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를 연방으로 표현했는데 통상 “연방”이라고 하면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던 북부를 가리키고, 남부는 “남부 연합”으로 표현해서 혼동을 피한다.
트럼프 관련 언급에서 “그는 많은 도시의 시장들이 연방주의자들에 의해 건립한 많은 유적들, 1861~1865년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던 로버트 E. 리와 같은 장군의 기념물을 제거하거나 파괴했다(358쪽)”는 주어와 서술어 자체도 맞지 않고 마치 트럼프가 기념물을 파괴한 것처럼 보여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나저나 “이들은 러시아의 산들을 등산할 때처럼 뉴욕의 혼란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이곳에 살기를 원하거나 러시아의 산들을 등산하려 들지 않는다(374~375쪽)”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 모든 걸 이해한다고 해도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오역이 아닐까 싶다. 미얀마를 설명할 때는 “이 나라에는 50만명의 승려와 5만명의 수녀가 있다(226쪽)”고 하거나, 테드 루즈벨트를 미국의 "초대 대통령(32쪽)"이라고 하거나, "2005년에 있었던 소련연방의 종식은 가장 거대한 지정학적 재앙이었다(151쪽)”고 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그렇다고 이 책 자체가 괴상망칙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자는 마치 세계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미국부터 영국, 인도, 독일, 바티칸, 중국 등 세계각지를 종횡무진 훑는다. 취재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사례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안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지리적 역사와 현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를 가로지르는 ‘붉은 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드러낸다. 물론 뒤로 갈수록 내용은 두서가 없어지고 자주 본론에서 이탈해 온갖 문제에 온갖 수다를 떠는 문명비평서처럼 느껴졌다는 것 역시 고백해야겠다. 특히 한반도 관련 언급은 어줍잖은 지식과 오리엔탈리즘이 어색하게 뒤섞인 맛없는 비빔밥이었다.
한국 현실과 연결시켜 귀담아 들을만한 멋진 구절을 인용해본다. 하나는 정치언어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찰했고, 또 하나는 트럼프 시절 미국 좌파의 위기를 진단한 부분이다.
“정치 언어의 위기가 곧 민주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라는 것이다… 정치 언어의 위기는 단지 기호학적인 병리학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악의 표시이며 또한 공적인 차원에서 공통된 규정들과 공유해야 할 예의, 그리고 우리를 서로 존중하게 만드는 시민 규약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402쪽).”
“미국의 좌파가 위기에 직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투우사의 붉은 망토처럼 작용하는 트럼프의 트윗에 휘둘려 마치 투우장의 황소처럼 날뛰는 것, 즉 트럼프의 자극에 마치 짐승처럼 난폭하게 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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