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공부 중에 가장 재미있는 건 역시나 역사(歷史) 공부다. 술자리에서 그 얘길 했더니 한 친구가 아니나 다를까 술 맛 떨어진다며 타박을 한다. 그러더니 이렇게 물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 하나만 꼽아봐라. 그래서 대답해줬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단 한가지 교훈은, 사람들은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다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느끼는 뼈저린 교훈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얘길 꺼낸 김에 싱거운 농담도 하나 덧붙여줬다. 그래서 말이야, 세상 모든 인간은 전생에 금붕어였던 게 아닐까. |
역사책을 읽어 보면 세상 일은 시행착오와 착각과 오만으로 일을 그르친 이야기로 가득하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때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위해 허깨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게 극명하게 드러나는 국제관계와 전쟁 역사를 보면, 새로운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하던 대로’ 하다가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건 대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버릇 때문인 게 태반이다.
조선시대 최악의 안보정책 실패라고 할 수 있는 병자호란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 조선이 넋 놓고 있다가 청나라한테 뒷통수 맞은 게 아니다. 조선에선 침략을 충분히 예상했고 나름대로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기본 방어 전략은 역시 오랫동안 효과가 입증된 산성에 의지한 종심방어와 강화도 피신, 삼남(충청, 전라, 경상) 지역 정규군 반격 조합이었다. 하지만 청나라가 감행한 전격전으로 조선의 방어전략은 한순간에 무력해졌다.
청나라 선봉대는 1636년 12월 8일 밤 압록강을 넘었다. 이들이 한양에 도착한 건 12월 14일이었다. 엿새 만에 대략 600㎞를 이동했다. 몽골군이 동유럽 원정을 할 때 하루 평균 90km 가량을 이동했다고 하는데, 드넓은 평원도 아닌 험준한 산악지형에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이 가로막고 있는 조선에서 비슷한 속도를 구현한 셈이다. 참고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기록을 보면 5월 22일 출발해 6월 1일 개경에 도착했다.(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가 쓴 <이슬람 전사의 탄생>은 무지와 착각, 오만과 착오로 상황이 갈수록 꼬이고 악화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하서사시같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오랜 기자 경력을 과시하듯 술술 재미있게 읽히는 글솜씨 덕분에 100여년에 걸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중동 정세와 이슬람 근본주의 문제를 요령있게 잘 정리한 걸 가장 큰 미덕으로 꼽을 수 있겠다. 물론 그건 이 책이 가진 큰 장점이지만, 이 책이 내게 특별하게 매력적인 건 ‘정책실패’가 왜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연구라는 의미 때문이다.
요즘은 좀 잠잠해진 듯 보일지 모르지만 중동은 테러와 내전, 근본주의와 권위주의 문제로 바람잘 날 없다. 극우 성향이 갈수록 강해지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에 핍박받는 팔레스타인,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나라없는 민족이라는 쿠르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갈등, 예멘 내전과 시리아 내전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최근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접수했다. 오늘날 중동 문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20세기 초 영국의 사기 행각(37~39쪽)과 미국의 일관성도 없고 상도의도 없는 중동정책과 만나게 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착각과 오만으로 일을 그르치는데는 세계 제일 강대국 미국만한 나라가 없다.
이슬람 근본주의, 이 책에서 표현하는 ‘이슬람 전사’들이 탄생하고 성장하는데도 역시나 미국은 중요한 마중물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던 걸 들 수 있겠다.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할 때 독재정권만 몰아내면 이라크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중동에 민주화 도미노가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런 오만함 덕분에 중동에 민주화 도미노가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이라크 정부와 군부 고위직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 국가기관까지 해체해버렸다. 그 뒤 벌어진 건 민주화 도미노가 아니라 무정부와 내란의 쓰나미였다. 미국이 이라크에 남긴 건 결국 시체와 불발탄과 실업, 미래를 잃어버리고 분노에 찬 극단주의였다.
때론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현혹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옛 소련 지도부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악몽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프가니스탄 정부 수반 하피줄라 아민이 미국 간첩이고 아프가니스탄이 소련 후방 파괴 공작을 위한 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1979년 크리스마스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105~107쪽). 사실 간첩 가능성이라는 얘기 자체가 아민과 갈등하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현지 요원들이 퍼뜨린 허위 정보였다(112쪽). 그 결과는 무자헤딘 육성이 돼 버렸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이슬람 세계를 격동시켰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아프간에서 자신들이 자유롭게 성전을 펼칠 무대로서의 가능성을 봤다(138쪽).”
가능성을 본 건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은 무자헤딘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132~136쪽). 레이건 행정부 당시 미 중앙정보국장이었던 로널드 케이시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아니라 소련이 전세계 테러리즘의 근원이라고 굳게 믿었다. “CIA 분석관들은 이는 사실 CIA 자체가 생산해낸 블랙 프로파간다, 즉 역선전이라는 증거를 케이시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케이시는 소련이 테러리스트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외부 전문가의 보고서를 가지고 압박했다(155쪽).”
그 결과 CIA는 “아프간 비밀공작 확대가 가져올 부담과 부작용에 대한 책임에 신중한 입장을 보인 CIA 내부(157쪽)”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내내 아프간에 막대한 무기와 돈을 지원하고 심지어 훈련까지 시켜줬다. 가령 미국이 가르쳐준 플라스틱 폭탄과 시한폭탄 사용법 등은 나중에 테러 공격의 모태가 됐다(158쪽). 미국은 무자헤딘에게 지대공무기인 스팅어미사일을 최소 500대에서 최대 2500대 지급했는데, 10년도 안돼 한 대에 8~15만 달러를 주고 미사일을 회수해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 의회는 약 6500만 달러의 비밀 예산을 승인해주기도 했다. 이 자금은 미국이 아프간 전쟁에 지원한 인도적 예산을 능가한다(160쪽).” 한마디로, 미국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셈이다.
미국이 키운 무자헤딘 이슬람 전사들, 특히 “아랍아프간(148쪽)”들은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가서는 “불경한 ’세속주의 정권과 미국 등의 외세를 이슬람 세계에서 축출하는 이슬람주의 무장 투쟁을 벌인다. 아프간 전쟁이 이슬람주의와 그 무장 투쟁 확산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12쪽).” 하지만 미국은 곧 자신들이 육성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사생결단 대결을 벌이게 된다.
사실 ‘아랍아프간’ 대다수가 실제로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 머물며 입으로만 지하드를 떠들었다(148쪽)”건 꽤 역설적이다. “전투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기 힘들었던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페샤와르 등지에서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지하드주의를 더욱 과격하게 다듬고, 관련 조직들을 결성했다(149쪽).” 그 대표주자가 9·11 테러를 일으켰던 알 카에다를 만든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고민들
최근 현직 대통령인 윤검사가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고 발언해 당사자인 이란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파문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중동 정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하다는 게 아닐까 싶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라는 국가와 국가 관계는 그나마 낫지만 시아파와 수니파, 무슬림형제단과 바트당,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까지 들어가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계는 넓고 울퉁불퉁하며, 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보니 이란 대통령이 한국을 국빈방문해서는 “한국의 적은 중국”이라고 말했다면 중국이나 한국 정부에서 어떤 반응이 나왔을지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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