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와 다랫재 사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들어서면 잔디가 깔려있는 너른 마당이 있는 걸 빼곤 특별할 것 없는 집이 한 채 있다. 집 안에 들어서면 한국화인듯 추상화인듯 싶은 그림을 그려놓은 한지가 빽빽하게 걸려 있고 벽에는 판화작품으로 만든 예쁘장한 병풍을 펼쳐놓은 작업실이 나온다. 1987년 가족과 함께 충북 제천군 백운면으로 둥지를 옮긴 이철수(66) 화백은 수십개는 돼 보이는 붓과 조각칼, 목재, 그리고 무엇보다 각종 철학책과 종교책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작업실 큼지막한 책상에서 수십년째 밑그림을 그리고 판화를 새기고 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민중미술가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이후 일상과 자연, 생명과 평화를 소재로 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오고 있다. 198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독일과 스위스, 미국 등에서 여러차례 개인전을 가졌으며 판화 산문집을 십여권 펴냈다. 농부로서 판화가로서, 어떨때는 명상가이자 수필가로서 삶을 살고 있는 이철수 화백이 말하는 건강한 삶의 조건을 들어봤다.
-농사를 지으며 판화를 새기는 삶은 어떤 삶일까 늘 궁금했다. 뭔가 막걸리 한 잔부터 떠오르는 안빈낙도하는 느낌일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론 죽비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면벽수련일 것도 같다.
“사람들이 나를 ‘농부’보다는 ‘화백’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나는 전업화가처럼 살지는 않는다. 봄부터 가을까진 천상 논과 밭에서 산다. 가을걷이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그제야 작품활동에 몰두한다. 보통 겨우내 밑그림 작업을 해두고 농번기에는 비가 오거나 해서 일을 쉴때 틈틈이 판화를 새겨서 작품을 만든다. 개인전을 하고 그림엽서를 보내는 것 말고는 외부활동은 별달리 하지 않는다. 가장 관심을 갖고 사는게 평화와 생명이다보니 환경운동연합과 ‘호아빈의 리본’이라는 평화단체 공동대표를 맡아서 도와주는 정도다.”
-간결하고 단순한 그림 속에 소소한 일상을 길어올린 작품이 많다. 선(禪)이라든가 마음을 울리는 철학적인 내용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작년 가을걷이가 끝난 뒤 줄곧 ‘무문관’(無門關)’이라는 불교 화두모음집에서 모티브를 딴 판화집 작업을 하고 있다. 겨울 내내 밑그림 작업을 했다. 1년은 걸릴 것 같다. 내년 쯤 책으로 내고 전시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원불교 경전인 ‘대종경’을 판화로 표현한 전시회를 하느라 3년간 기운을 다 써버리느라 예정보다 늦어졌다. 원래 판화 100점을 기획했는데 200점을 했다. ‘대종경’과 ‘무문관’을 마치면 ‘성경’을 내 나름대로 해석한 연작작품집에 착수할 계획이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성경까지 마치고 나면 내가 세상과 약속했던 목표는 다 이루는 셈이다. 그럼 마음의 짐을 덜고 좀 더 홀가분해지지 않을까 싶다.”
출처: 서울신문
-1980~90년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관련 대규모 집회가 열릴때마다 ‘이철수 화풍’으로 표현한 걸개그림을 볼 수 있었다. 특히 1988년 울산 골리앗 투쟁 당시 크레인에 걸렸던 ‘거리에서’는 지금도 그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작품을 보면 날이 서있다고 할까 분노가 느껴졌다. 지금과는 상당히 결이 달라서 놀라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국어나 고전문학만 성적이 좋았고 대학도 가지 않았다. 글을 쓸까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다 군대에 갔다. 문학은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 많은데 미술은 그런게 적었다. 제대할 무렵 그럼 나라도 해보자 결심했다. 80년대는 저항이 당연한 시대였다. 판화를 통한 변혁운동을 했다. 그 시대에 맞는 작업을 했던 것 같다. 80년대 후반부턴 고민이 많아졌다.
강하고 거칠고 날카로운 작품에 사람들이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점점 더 눈에 보였다. 감성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진보적인 언어가 꼭 저항적이고 완강하고 그런것만이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스스로 갖게 됐다. 고민 끝에 아주 분명하게 변화를 받아들이게 됐다. 내 스스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독일 순회전을 위해 3주 동안 독일을 둘러보면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독일에서 순회전을 할 때 마침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들었다.
“베를린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독일 기자들한테서 소감을 묻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짧은 영어로 독일 통일에 대한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케테 콜비츠라고 유명한 사회참여 예술가가 있는데 그의 작품조차 독일에서 이미 잊혀지고 있는 걸 보았다. 한 시대에 유효했던 예술적 가치가 다음 시대에도 고스란히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독일 전시회를 주선한 한 준비위원이 내 그림에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을 때 받은 충격도 엄청났다. 그 자리에선 부정했지만 귀국한 뒤 1년 가량 작업도 못할 정도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그 말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놓아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마음 고생을 많이 하다보니 마음 공부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고 작품에도 반영이 됐다. 우리는 옳고 너희는 그르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고 작품 역시 투쟁보다는 생명과 평화, 관조와 성찰로 옮아가게 됐다. 세상의 모순을 이야기하는건 맞다. 하지만 미움이 앞서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농사 열심히 짓고 논밭이 공부 도량이라고 생각하며 살게 됐다. 그러다가 정말 가끔 한번씩 화가로서, 내가 세상 사람에게 건네는 이야기마당같은 마음으로 판화를 새기고 전시를 한다.”
출처: 서울신문
-작품마다 깊은 성찰을 담은 글귀가 인상적이다. 이떤 이들은 ‘그림으로 시를 쓴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산문집도 여러 권 냈는데.
"노동 속에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길어올린 생각의 조각 조각을 가지고 그림을 만든다. 일종의 고백이기도 하고 성찰이기도 하고 때로는 청유이기도 한 그림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일은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평소에 메모해둔 게 바탕이 된다. 예전에는 메모를 많이 했다. 요즘은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예전만큼 메모를 하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서 교육문제로 힘들어하지 않는 부모가 없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자녀들을 사교육으로 몰고 일부는 그걸 거부하며 대안학교로 보내기도 한다. 귀농하는 삶을 살면서도 정작 자녀 둘을 대안학교가 아니라 일반학교를 보낸게 얼핏 독특해 보이기도 한다.
“중학교 졸업할 때쯤 아이들이 먼저 대안학교 얘기를 꺼냈는데 일반 학교에 가라, 대신 하고 싶은 걸 하고 싫은 건 안해도 된다고 했다. 당시 했던 이야기는 ‘때로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라 하더라도 동시대의 또래들이 경험하는 것에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만 억압에서 벗어나 있고 너만 자유로워지고 열외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경험하는 것 속에서 함께 있는게 좋다고 했다. 사실 대안학교 교장 자리를 제안받은 적도 있는데 내가 거절했다. 대안학교가 좋아지는 건 사실 우리 사회엔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규학교가 좋아지도록 방법을 찾는게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아이들도 예외로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귀농·귀촌을 꿈꾸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귀농이란 말이 생기기도 전에 귀농을 했던 귀농선배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1987년 이 곳에 정착했다. 당시 ‘샘이 깊은 물’에 ‘탈서울의 변’이라는 기고문도 썼다. 서울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에서 도망치는 거나 다름없었다. 자연이 나에게 많은 걸 베풀어주고,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와보니 그게 아니더라. 자연이라는게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사람에겐 말도 건네지 않고 배려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폭력은 지향해야 할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시골 생활을 통해 ‘언어’를 바꾼게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진 핵심이었다.”
-생명과 평화, 농사와 예술이 조화를 이룬 삶은 사실 많은 이들이 꿈꾸는 ‘건강한 삶’에 꽤 가까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건강한 삶’을 위한 조언을 해준다면.
”코로나19를 보면서 쉼없이 건강한 삶이란 주제를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애정이 결핍되는 이런 시대에 생명을 좀 더 생각해보는 삶을 권해주고 싶다. 작게라도 텃밭도 좋고, 여건이 안되면 베란다 농사나 화분농사도 좋고, 하여간 흙과 만나는 삶을 권해주고 싶다. 흙을 만지며 그 속에서 생명을 키우는 자리를 품고 살면 고맙겠다. 별볼일 없는 푸성귀 하나도 다 한 생명이다. 돈주고 사서 홀랑 입어 털어놓는 게 아니라 사람과 푸성귀가 생명과 생명으로 만나는 관계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서울신문 2020년 4월29일자 16면에 실린 인터뷰를 일부 수정보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두 점을 이철수 화백 허락을 얻어 인용했다.(출처는 이철수화백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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