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서쪽에 자리잡은 석모도에는 보문사라는 절이 있다. 관음신앙으로 꽤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보문사 뒷편에는 큼지막한 마애석불이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꽤나 멋지다는 얘길 들었다.
얼마전 주말에 가족여행으로 석모도를 가는 길에 보문사에 가봤다. 거기서 내가 본 것은 관세음보살도 아니고 고즈넉한 천년사찰도 아니었다. 만사형통 건강장수를 파는 쇼핑몰이 있었을 뿐이다.
석모도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는 2,000원이다. 식당과 커피숍이 즐비한 ‘먹자골목’을 걸어서 올라가면 보문사 일주문이 나온다. 성인 2,000원. 돈 없으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할 생각하면 안된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너무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건 보문사 입장에서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문사 경내에서 가장 눈을 어지럽히는 건 돈을 내라며 벌어지는 다양한 할인행사였다.
기와불사, 연등불사는 기본이다. 각종 절기에 맞춰 제사를 지낸다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불탑을 1만개나 세운다며 돈내고 복받으라고 권한다. 아예 대놓고 돈내면 자손대대로, 거기다 다음 생에서도 복받는다고 써놨다.
보문사 뒷편으로 마애석불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초입부터 빽빽히 걸린 연등이 계단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마애석불 앞에는 금빛 찬란한, 십중팔구 훨씬 더 많은 돈을 냈을 황금색 연등이 줄줄이 사탕이다. 연등에는 하나같이 이름과 주소, 그리고 어떤 복을 원하는지 빼곡히 써 있다. 취업기원, 승진기원, 무병장수, 자손번성…
보문사에서 봤던 광경과 매우 비슷한 광경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다. 신도가 40만명에 이른다는 도선사라는 절이다(여기).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도선사는 멋드러진 소나무가 참 많다. 대웅전 뒷편으론 우뚝 솟은 북한산 정상이 한눈에 보이고 앞쪽으론 산줄기가 거칠것 없이 이어진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는 또 얼마나 멋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아름다운 광경을 압도해버리는 건 절 곳곳에 자리잡은 복전함이었다.
도대체 몇개나 되는지 궁금해서 하나씩 세보다가 스무개 언저리에서 포기했다. 각종 현수막 내용 역시 하나같이 불사, 불사, 불사… 신앙심이 얕은 중생 눈에는 그저 ‘돈내세요 돈내세요 돈내세요’로 보일 뿐이다. 도선사에서 팔던 화분은 또 어떤가. 합격을 기원한다는 ‘합격화’가 1만 원,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행복화’가 5,000원이란다.
생각해보면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절, 그리고 머리를 깎고 결혼을 하지 않는 승려란 꽤나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 느낌을 풍기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유럽 중세에서 등장한 수도원 운동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녀가 없으니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서유기에도 나오듯이 오공 오정 하는 식으로 돌림자를 쓰는 법명은 강력한 형제애와 소속감을 부여한다. 그 속에서 특정한 신을 섬기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 혹은 전문가 집단이 성장했다.
21세기 우리 눈에 비친 사찰은 어떤 모습일까. 내 느낌만 얘기한다면, 교회랑 별반 다르지 않다. 나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 눈으로는 한국 지식생태계와 괴리된채 무병장수 기도에 열중하고, 각종 재산분쟁과 그들끼리만 치열한 파벌싸움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딱 개신교가 비판받는 지점과 겹친다. 물론 어떤 분들은 템플스테이를 예로 들며 반론을 제기할 듯 하다. 여러 측면에서 어른 역할을 하는 스님들이 있다는 지적도 나올 것이다.
맞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점 오해 없기 바란다. 하지만 일부 유치원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 유아교육 자체를 욕하는게 아니듯, 불전함으로 도배된 사찰을 비판하는게 불교 자체를 비판하는 건 아니다. 불교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간절히 바라는건 딱 하나. 한국 불교가 만사형통 사찰쇼핑몰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것 뿐이다. 1000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 불교가 뭐가 아쉬워서 만사형통 십자가 쇼핑몰 흉내를 낸단 말인가. 어차피 우리나라 종교예산 십중팔구를 지원받는데다 문화재관람료란 이름으로 들어오는 자릿세 수입도 든든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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