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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최루탄, 살상무기의 추억

by betulo 2015.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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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가 대통령이던 시절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도시생활이란 걸 처음 해봤다. 학교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갑자기 뭔가 목구멍을 콱 막아버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오감은 지금도 당시 느꼈던 짧지만 강력했던 고통을 기억한다. 최루탄은 그렇게 내게 호환마마보다도 무서운 첫인상을 남겼다. 

 대학생이 되고 보니 최루탄이란 걸 더 가까이 자주 겪게 됐다. 자꾸 접하다 보면 무뎌진다. 전경들이 집어던지는 사과처럼 생긴 ‘사과탄’은 무경험자에겐 상당한 고통을 주지만 나중에는 던지면 던지나 보다 하는 정도로 존재감이 사라진다. 총처럼 생긴 물건으로 쏘아대던 최루탄도 직접 맞는게 겁날 뿐 최루탄으로선 별 감흥이 없어진다. 

 정말 무서운 건 ‘지랄탄’이다. 이른바 페퍼포크라고 부르던 최루탄 발사차량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하늘높이 쏘아대는 지랄탄이 땅에 떨어지며 ‘미친X 널뛰기 하듯’ 요동을 치며 한치 앞도 안보이는 진한 연기로 뒤덮어 버리면 말 그대로 ‘죽음’같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지랄탄이 가장 고통스러운 조건이 있다. 덥고 바람이 없는 날 지랄탄은 말 그대로 살인무기나 다름없다. 안개낀 날, 이슬비 내리는 날은 지랄탄이 흩어지질 않기 때문에 고통이 극대화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지랄탄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발을 좀 담그고 나면 무좀이 없어질 정도다. 

 지랄탄을 막기 위한 다양한 대책도 선배들한테 전수받았다. 마스크 안쪽에 화장지를 덧대는 건 기본이다. 눈 밑에 치약을 발라놓는 방법도 있다. 지랄탄이 지나가고 나면 대개 너도나도 담배를 피우며 담배연기를 눈에 불어주는 건 지랄탄 대응으론 어떨지 몰라도 동지애를 키우는데는 특효약이다. 

 군대에 입대하고 신병교육 훈련 과정 가운데 하나가 화생방 훈련이다. 방송이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꽤나 대단한 추억꺼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을 할 때 많이 실망했다. 기대(?)를 충족하기에 군대 최루탄은 지랄탄보다 턱없이 약했다.  

 최루탄에 면역이 생겨버린, ‘쫘장면 먹고 좌전거타는’ 좌경학생들을 위해 경찰이 내놓은 신상품이 있다는 걸 풍문으로 들었다. 이름하여 ’칙칙이’. 직접 맞아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분무기로 물 뿌리듯이 최루액을 뿌리는데 조금 지나니 피부에 수포가 생기고 가렵고 상당히 괴로웠다. 
 처음엔 광주에서만 사용하는 걸로 들었던 칙칙이는 금새 전국 공통 시위진압장비가 됐다. 칙칙이로 인한 피해사례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어느날 경찰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거짓말처럼 시위현장에서 최루탄이 사라졌다. 칙칙이도 모습을 감췄다. 물론 가끔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했다는 논란이 일어난 적은 있었지만 꽤나 예외적인 일로 느껴졌다. 주말에 서울시내 전체가 최루탄으로 뒤덮이는 풍경은 이제 상상도 잘 안되는 아주 오랜 얘기처럼 느껴지게 됐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발전하는 줄 알았다. 

 최루탄이 돌아왔다는 신호는 어쩌면 2011년 국회 본회의장이었던 것 같다. 한미FTA를 국회가 인준할때 국회의원 한 명이 이에 항의해 본회의장 단상에 최루탄을 뿌렸다. 본회의장이 매캐한 연기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무척이나 기괴한 장면이었다. 그즈음이었나. 시위현장에서 칙칙이를 사용하는 게 눈에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전직 국회의원 모임 헌정회가 2011년 11월 23일 김선동(민주노동당 의원)을 국회에서 추방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서에서 쓴 표현이 지금도 기억난다. “살상무기에 해당하는 최루탄을 투척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서도 방임될 수 없는 엄중한 범죄행위”란다. 그랬구나. 경찰이 수십년간 살상무기를 썼던 거구나. 의원들은 그동안 뭘했지?


 4월16일은 세월호 참사 1주기였다. 경찰은 칙칙이 뿐 아니라 최루액 물대포까지 유족들에게 뿌려댔다. 호흡곤란과 구토, 현기증을 호소하는 피해가 속출했다고 한다. 최루탄이 없어질 때 세상이 발전한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하지만 세상에 자동으로 이뤄지는 진보는 없다. 그게 나이를 먹어가면서 얻은 교훈이다. 때로 세상은 아주 더러운 방식으로 퇴화한다. 

인권연대(www.hrights.or.kr)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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