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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세월호 그 후

by betulo 2014.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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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 국무회의에서는 세월호참사의 후속조치로 발의돼 국회를 통과했던 ‘유병언법’, ‘세월호특별법’, 정부조직법 등 이른바 ‘세월호3법’을 의결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16일 이후 216일만이다. 이에 따라 재난안전관리를 총괄하던 안전행정부는 출범한지 2년도 안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국민안전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소방방재청과 해양경찰청은 모두 국민안전처로 흡수됐다.

 국민안전처 앞에는 적지 않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세월호 참사 역풍으로 바닥까지 떨어지는 사기를 추스르고 재난안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기존에 재난안전 총괄기구였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관계자 가운데 세월호 참사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이 국민안전처로 옮기면서 사실상 승진에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됐다는 따가운 비판도 있다.

 국민안전처 조직구성 자체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엔 크게 미흡해 보인다. 재난관리를 전공한 이동규 동아대학교 석당인재학부 원장에게 물어봤다. “한마디로 한지붕 세가족이고 ‘적과의 동침’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재난관리를 위한 일사불란한 총괄기구에 너무 초점을 맞춘 것 아닌가 싶다”면서 “당장 조직화합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국무총리가 중앙대책본부장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차피 총리는 대통령에게 보고를 할테니, 결국 보고체계만 복잡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이런 비판은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간판 말고 정부에서 바뀐게 무엇이냐는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사실 그동안 정부여당에선 세월호 기억을 지워버리는데 급급했고 이를 위해 유족에 대한 인신공격과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유족들에게 언제라도 만나겠다며 특검과 특별법을 언급했던 대통령은 7월 지방선거가 끝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태도를 바꿨다.

 세월호 참사가 한국사회를 바꿔놓은 가장 치명적인 변화는 안타깝게도 국가에 대한 신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고 책임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스스로 훼손했다. 5월 대국민담화에서 각종 후속대책을 발표하고 대국민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정작 그 이후 대통령이 스스로 밝힌 후속대책은 정부·여당의 반대에 막혀 수개월간 표류했다.

 4월16일 하루에만 수십차례 세월호 관련 보고를 받았다는 대통령은 정작 오후 5시쯤 중대본에선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던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물었다. 실종자들이 바다에 떠 있는게 아니라 침몰한 배 안에 갇혔다는 기본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이 7시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발언함으로써 ‘사라진 7시간’에 대한 논란에 불을 붙였다.

 그래놓고는 극우신문 산케이를 언론자유투사로 만들어주는 건 또 무슨 경우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기소를 할 거라면 조선일보 칼럼을 먼저 기소해야 할텐데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대한민국 소음공해 1번지가 돼 버린 동아일보사 앞을 지나가는데 현수막 걸려있는게 나를 웃겼다 “박근혜 대통령 성희롱한 산케이 지국장 구속하라.”

 한국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마지막 기회는 아마도 세월호 특별법을 통해 내년 1월1일부터 최장 18개월간 활동하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위)가 될 것이다.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규명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 사회자본 침몰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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