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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여권에 있는 주민번호가 초래하는 개인정보유출

by 자작나무숲 2014. 10. 28.

 지난해 12월 취재차 중국 베이징에 다녀온 적이 있다.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13세기 중요한 인물로 꼽고 싶은 쿠빌라이칸이 도읍으로 삼은 ‘칸의 도시’에서 유래한 천년수도 베이징을 방문해서 정작 가장 놀랐던 건 베이징 도착한 날부터 중국어로 쏟아진 문자메시지였다.

 처음엔 중국 당국에서 보낸 문자인가 했다. 현지 가이드가 얘기해주길 ‘젊고 헐벗은 세계 각국 아가씨들이 당신을 기다린다’는 뜻이라고 했다. 시시때때로 도착하던 중국어 문자는 신기하게도 베이징을 떠나는 날이 되자 딱 끊어졌다. 그날 이후 중국어 문자메시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

 스팸문자를 보낸 업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휴대전화번호는 물론 중국 체류기간까지 알았던 것일까. 최근 여행업에 종사하는 분한테서 제보를 받고 나서야 비밀이 풀렸다. 해외에 가서 호텔에 숙박하거나 렌터카 회사에 갈 때 여권 사본을 제출하곤 한다. 전화번호도 적는다. 전화번호를 아는 건 일도 아니다. 체류기간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스팸문자 몇 통 오는 걸로 끝난다면 사실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여권에는 생년월일과 주민번호 뒷자리가 적혀 있다. 한국인에게 주민번호는 일종의 '마스터키'다. 마음만 먹으면, 개인신상 터는 건 누워서 떡먹기다. 

심지어 회원가입한 포털이나 SNS 사이트 들어가서 이상한 글을 올릴 수도 있고, 아예 계정을 삭제해버릴 수도 있다. 해커 수준의 컴퓨터 지식도 필요없다. 전국민 평균 수준의 컴퓨터 사용능력과 나쁜 마음, 그리고 주민번호만 있으면 가능하다. 

 제보를 해준 분은 렌터카 회사와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한국인 손님들이 오면 여권에 있는 주민번호를 복사해서 써먹는 걸 많이 봤다고 한다. “한류 스타 여배우가 제가 일하던 호텔에서 숙박한 적이 있는데 신분 확인하고 여권을 복사합니다. 그거 유출 잘 됩니다.”

 스팸문자나 스팸메일을 받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홀가분하게 떠난 해외 여행지에서도 스팸문자가 시시때때로 쏟아진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근원에는 우리가 그동안 관리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온갖 곳에 다 사용하던 주민번호가 자리 잡고 있다.

 국회에 가서 방문증을 받기 위해 신분증을 제출했더니 그걸 받아든 경비 아저씨가 대뜸 고향을 물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주민번호 뒷자리가 자기랑 비슷한 걸 보니 고향이 근처인 것 같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분 말씀이 맞았다. 우리는 주민번호만 있으면 모든 걸 알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애초에 여권과 운전면허증은 그 자체로 신분을 증명한다. 주민번호 표기를 지우기만 해도 시민들에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공인인증서, 샵메일, 아이핀, 마이핀 등 모두 주민번호를 기반으로 한다. 현관문 도어록 비밀번호가 유출되자 부랴부랴 도어록은 바꾸면서 정작 비밀번호 바꿀 생각은 못한다.

내 휴대전화 화면캡쳐.


글을 처음 올린 건 2014년 10월28일.

10월31일 1차 수정. 논리전개가 어색한 부분을 보완하고 두 개 단락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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