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지 10년 가량 된 옛날 글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솔직히 만감이 교차했다. 북측 당국자들에게는 십중팔구 '북한붕괴론'과 '흡수통일'로 들렸을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이 대통령 (연)기자회견에서 나온 뒤 느닷없이 통일 얘기가 넘쳐난다. 이명박 정권 5년간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북한 망하기만 기다렸는데 이제 좀 달라지나 했더니 돌고돌아 원위치다.
북한을 흡수통일해 고속도와 철로와 아파트로 북녘땅에서 건설경기 부흥과 원자재 약탈할 기회를 기다리는 분들은 100년전쯤 일본 당국자들이 딱 그런 마음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하긴 역사인식도 일본 따라가는 분들이니 당시 기억을 교훈삼아 더 열심히 북한식민지화에 나서는건 아닌가 싶어 소름까지 돋는다.
북한정권 무너지면 돈 벌 생각하는 분들은 이 글 굳이 안 읽어도 된다. 인권을 생각하고 평화를 생각하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2014년 1월15일 속이 답답해서 느닷없이 몇 자 적는다)
[북한인권] 탈북 7년째 맞은 박술희씨의 고백
2004/10/29
“그들은 하나님 사랑으로 불쌍한 사람 살려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썩 기분은 좋지 않다. 돈벌이를 위해 탈북자를 이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더구나 언론에 탈북자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정말 문제다.”
한국에 온 지 7년째인 탈북자 박술희씨(가명)는 기획입국이나 탈북 입국자를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것 모두를 부적절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탈북자 한국 입국을 언론에 공개 안하면 이북 정부에선 행방불명으로 두면 돼지만 언론에 공개해 버리면 체제이탈자로 처리해야 한다. 이는 남북 정부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는 일부에서 벌이는 북한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들 말대로 김정일 정권이 무너진다고 북한 주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후세인 정권 무너졌다고 이라크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고 반문하면서 “자기만 옳다고 믿지 말고 남도 인정해주는 자세를 가질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그는 “집에 손님이 와서는 자기 식대로 집을 바꾸려 들면 어느 주인이 좋아하겠느냐?”고 물은 뒤 “손님은 손님답게 예의를 지키면서 정말 바꿀 게 있다면 조언해주면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남북 사이에 경제 격차가 큰 건 누구나 인정한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서 조금씩 스스로 바꿀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 현대아산처럼 이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박씨는 “식량난 때문에 탈북한 것은 아니며 이북에서 전문직에 종사했다”는 것을 빼고는 “북에 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며 일체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온 박씨는 이제 직장도 생겨 생활이 많이 안정돼 있다. “처음엔 이북 사투리 쓴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더라. 이남도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있지 않느냐. 왜 색안경을 끼고 보는지 모르겠다. 한국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조건 배척하는 병통이 심하다.”
94년부터 식량난이 본격화됐을 때를 회상하며 “그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 참 많았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국가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 줬기 때문에 돈욕심 부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식량난이 생기고 나서는 배급이 끊기고 병원에선 의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불법시장에서 식량이나 필요한 물품을 돈 주고 사야했다. 사람들은 점차 돈만 알게 되고 강도, 살인 같은 강력범죄도 일어났다.”
박씨는 “한국 사람들이 이북에 대해 오해하는 게 참 많다”며 몇가지 예를 들었다. 박씨는 “길거리에 시체가 있는 걸 본적이 한 번 있다”면서도 “먹고 살기 어렵고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긴 했지만 ‘아사자 시체가 길거리에 쌓여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부 탈북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지나치게 부풀린다”고 꼬집었다.
조-중 국경을 넘었다가 북으로 다시 돌아오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박씨는 “노동교화소에서 몇 개월 있다가 사회에 복귀한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는 “물론 국경을 넘은 이유가 한국과 연관되는 경우는 처벌강도가 강해지겠지만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출신성분에 따라 입당자격에 제한이 있다”는 ‘상식’에 대해서도 “그건 80년대 초반까지 얘기”라며 “박정희 정권 때는 정세가 엄혹해서 그런 게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자기가 성실히 일해서 인정받으면 당원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남에 와서 보니 학교에서 객관식으로 문제를 낸다고 들었다”며 “이북에선 초등학교부터 모든 시험문제를 주관식으로 내고 중학교부터는 주관식 필기시험과 구두시험으로 성적을 매기다 보니 표현력과 창의력이 발달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사회든지 장단점이 있고 배울 부분이 있다”며 “색안경을 끼고, 그것도 ‘빨간 색안경’을 끼고 북한을 보지 말아달라”고 강조했다.
박씨는 “이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겨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이북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북에 있는 식구들을 만나면 ‘자식으로서 불효하는 걸 용서해달라. 자신은 잘 살고 있으니 걱정마시라’고 말하고 싶다”며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고향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2004년 10월 29일 오전 2시 14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탈북자 북송반대, 인권과 정치 혹은 인권정치 (2) | 2012.04.14 |
---|---|
탈북자인권 소동이 탈북자를 사지로 내몬다 (12) | 2012.03.05 |
내가 만나본 홍진표와 뉴라이트 (97) | 2010.11.19 |
방문진 새 이사 최홍재, 만세파에서 네오콘으로 (6) | 2009.08.03 |
새로운 인권대사 제성호의 인권인식수준 (4) | 2009.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