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평소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를 하는 걸로 유명하다. 2018년에 임기가 끝난 뒤 박 대통령이 기록한 수첩은 어떻게 될까.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통령으로서 남긴 작은 메모지 하나라도 모든 소유권은 국가에 귀속된다. 수첩이 가야 할 곳이 바로 대통령기록관이다.
대통령기록관은 대통령 관련 문서와 전자기록물, 선물 등 대통령이 남긴 모든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국민에게 서비스하는 국가기록원 소속기관이다. 2007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 주도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하면서 2008년 4월 문을 열었다. 현재 대통령기록관은 엄격한 보안과 최첨한 보존장비를 갖추고 있다. 서고는 내진 설계는 기본이고 벽면 두께가 60㎝나 되고 제곱미터당 1200㎏ 하중을 견딜 수 있다.
대통령기록물 제도는 한국 기록관리제도에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사관(史官)은 궁중에 교대로 숙직하면서 조정 행사와 회의에 모두 참석해 일종의 속기록인 사초(史草)를 작성했다. 사초는 임금도 볼 수 없었고 유출하거나 왜곡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실록을 편찬하면 사초는 모두 자하문 밖 세검정 차일암에서 물에 빨아 기록을 파기하는 세초(洗草)를 했다.
세초를 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사초 내용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사초를 본 것은 연산군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신하들이 모두 사초 열람을 반대해 여섯 곳만 발췌한 것만 겨우 열람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대통령기록관은 사초를 보관하도록 한 셈이다. 더구나 과거 정부기록보존소가 조선시대 사고(史庫)처럼 기록물을 보관하기만 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기록관은 보존 뿐 아니라 정리와 평가, 연구지원, 대국민서비스까지 담당한다.
법령은 정비했지만 현실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국가적 논란이 됐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문제는 기록연구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국회 결의를 거쳐 7년·15년·30년 등 지정한 기간 동안 봉인하는 지정기록물을 열람토록 한 것은 조선시대로 치면 실록을 공개한 셈이다. 더구나 "연산군도 하지 않은 사초 폐기"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정상회담 회의록을 둘러싼 논란은 실상 '연산군도 감히 하지 못한' '사초 열람'과 ‘사초 공개’ 사태까지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이 기록물을 괜히 남겨서 고난을 자초했다”는 평가와 함께 기록관리의 근간을 흔들어버렸다(여기). 특히 2008년에 봉인됐던 e지원 기록물에서 회의록이 사라졌다(여기)는 것은 대통령기록관의 신뢰까지 땅에 떨어뜨렸다.
사실 노무현은 '기록 대통령'이란 별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임기 내내 기록관리 제도화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역시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제정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기록 열정이 후임 잘못 만나 자신을 찌르는 칼날이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현재 대통령기록관이 보관중인 기록물은 모두 1968만 8049건이다. 이 가운데 1087만 9864건은 이명박 전 대통령, 755만 7118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기록물이다. 얼핏 이 전 대통령이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긴 것 같지만 구체적인 내역을 두고는 논란이 적지 않다. 2008년부터 4년간 생산한 대통령기록물이 82만 5701건이었는데 불과 1년 사이에 10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비롯해, 중요 국정 자료라 할 수 있는 비밀기록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것도 비판을 받는다.
게다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인 ‘공감코리아’(현 정책브리핑) 기록물 367만여건, 단순반복업무인 식수관리 등에 사용하는 개별업무시스템(약 329만건), 경호처(6만여건) 등 실질적인 대통령기록물로 보기 어려운 기록물이 대거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에서는 “참여정부보다 비교해 숫자를 끼워 맞춘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여기). 이런 논란은 현재 진행중인 이 전 대통령 관련 기록물 재분류 결과를 지켜봐야 명확하게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기록관에 있는 북한 선물 9점
대통령기록관에는 각종 문서만 있는 게 아니다. 정상회담을 할 때 주고받는 각종 선물도 소유권이 국가에 있으며 퇴임 뒤 모두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해 관리하게 돼 있다. 특히 박정희·노태우·김대중·노무현 전직 대통령들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한테서 받았던 선물 9점이 눈길을 끈다.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밀사로 보냈다. 5월 2일부터 나흘간 김 주석과 당 중앙 조직지도부 부장 김영주와 두차례 회담을 한 뒤 귀국하면서 김 주석이 박 대통령에게 전하는 선물을 받아왔다. 바로 금강산에서 승천하는 선녀를 자수로 수놓은 ‘선녀도’다. 박 대통령은 이듬해 2월 17일 남북적십자사 회담 대표단으로부터 김 주석이 보낸 청자 모란 무늬 항아리를 전달받았다.
선물 가짓수가 가장 많은 역대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 1990년 9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연형묵 북한 총리는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을 예방한 뒤 대나무 문양 다기 세트, 까치와 꽃문양이 있는 소라 장식 화병, 은수저, 수세미 문양 나전칠기 화병과 원형함, 보석장식 꽃문양 은제 다기 세트, 보석 장식 꽃문양 은제 다기 세트 등을 선물했다.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했던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김 국방위원장한테서 직접 선물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6월 정상회담 당시 풍산개 두 마리를 선물받았다.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이름을 딴 풍산개는 호랑이와 맞서 싸울 정도로 용맹한 사냥개로 유명하다. 풍산개 두 마리는 원래는 대통령기록관으로 와야 했지만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특성상 서울대공원에서 살다가 지난해 노환으로 죽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정상회담 당시 칠보산 송이버섯 500상자, 약 4t 분량을 선물받았다. 함북 명천군에 위치한 칠보산은 산세가 아름답고 생태계가 잘 보존돼 ‘함북의 금강’으로 불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나는 송이버섯은 최고급으로 대접받는다. 김 위원장은 2000년 9월에도 송이버섯 총 3t가량을 추석 선물로 보낸 바 있다. 정부는 송이버섯 선물을 각계 인사들에게 분배했기 때문에 대통령기록관에는 남아 있는 송이버섯이 없다.
대통령기록관은 현재 경기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현재 세종시 문화시설지구에 짓고 있는 새 청사가 내년 하반기 완공되면 시범운용을 거쳐 내후년부터는 별도 건물로 분가를 할 수 있다. 국무총리실 동쪽에 호수공원과 인접한 곳에 자리잡게 될 세종시 새 청사는 공사비 1111억원을 들여 연면적 3만 1219㎡, 지하2층 지상4층 규모로 공사중이다. 서고 넓이만 해도 5953㎡나 된다.
다만 이전 이후 기록물 보존과 관리를 위한 장비구입 등 필요한 예산 가운데 200억원 가량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게 걸림돌이다. 정부 관계자는 “현재 기획재정부와 내년도 예산안 협의를 하고 있다”면서 “예산편성이 안되면 청사 이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올해 대통령기록관리 예산규모는 69억원, 정보화 관련 예산은 12억원이다. 대통령기록물 공개재분류 대상이 올해 15만건에서 2017년에는 230만건이 넘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폭주하는 업무량을 감당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다양한 견학 프로그램도 있어
대통령기록관을 어린이·청소년 등을 위해 기록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견학·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2008년 4월부터 현재까지 기록관을 방문한 일반인만 해도 6만 6000명에 이른다.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현장체험학습(연간 20회), 사회적 소수자 초청 견학(연간 5회), 토요기록문화학교(연간 6회)를 비롯해 방학 기간 실시하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기록문화 체험교실’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상설전시관인 대통령기록전시관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시로 운영한다.
9월부터는 ‘대통령 선물로 본 세계문화’도 청와대 사랑채 1층에서 기획 전시할 예정이다. 5개 대륙에 걸쳐 역대 대통령이 선물받은 약 50점을 통해 우리나라의 정상외교 활동과 증정국가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할 예정이다.
시설견학은 서고와 복원실 등 보존관리 공간을 둘러보기 때문에 반드시 산전예약을 해야 한다. 견학신청은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pa.go.kr)에서 할 수 있으며, 팩스(031-750-2150)와 이메일(wje21c@korea.kr)로 최소 1주일 전에 사전신청을 해야 한다. 문의전화는 031-750-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