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사가 ‘재난·안전관리’가 될 것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안전관리 예산 확대를 지시했고 국회에서도 안전예산 확대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예산절차를 고려하지 않은 지시가 쏟아지면서 벌써부터 ‘거대한 졸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재부가 4월 15일 발표한 ‘2015년도 예산안 편성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 지침’에서 “재원대책 없는 세출확대 없다”며 예산 구조조정을 공언한 것에서 보듯 당초 정부는 재난·안전관리 예산을 확대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안전예산의 정확한 기준조차 없다. 기재부와 안전행정부, 국토교통부 등 정부부처마다 적용 범위가 제각각이다.
헌법에 따라 정부는 10월2일까지 국회에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6월까지는 각 부처에서 기획재정부에 예산요구서를 제출하고 9월까지 정부부처·당정·시도지사 협의를 거친다. 국가안전처를 비롯해 전반적인 안전예산을 편성하기 위한 시간은 길게 잡아도 4개월이 채 안된다.
정부로서는 촉박한 일정과 시급한 안전예산 확대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이는 곧 빈수레만 요란한,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안전예산 확대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녹색성장’ 항목에 4대강 사업 예산을 포함시키거나 현행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에 댐건설 항목이 포함된 사례에서 보듯 예산 범주를 조금만 바꾸면 안전예산이 늘어난 것처럼 포장하는 건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국가가 나서야 하는 현안은 갈수록 늘어난다. 하지만 정부는 증세를 비롯한 재원마련 대책을 외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국고보조사업 방식으로 안전예산을 편성하거나 기존 국고보조율을 낮출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예산서만 놓고 보면 중앙정부는 예산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지자체가 떠안아야 한다.
이미 선례도 있다. 기재부는 지난해 소방방재청 소관 재해위험지역정비사업과 우수저류시설설치사업 국고보조율을 일방적으로 60%에서 50%로 낮춰버렸다. 이로 인해 지자체가 올해 추가부담해야 하는 예산규모는 각각 704억원과 131억원이나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안전처에 특별교부세 배분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지자체 통제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자체 관계자는 “특별교부세는 특별한 재해가 없을때는 연말에 지자체 인센티브로 나눠주는 게 관행이었고 이는 안행부가 지자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됐다”고 말했다. 특별교부세는 내국세 총액의 19.24%를 재원으로 하는 지방교부세 가운데 3%를 차지하며 올해 규모는 약 1조원이다. 특별교부세 중 50%는 재해대책수요에 사용하도록 돼 있다.
전문가 진단: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은 안전예산 확대라는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자칫 각종 사업에 모두 안전이라는 꼬리표를 새로 달고 예산확보에 나서는 ‘예산 줄서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재정정책 전문가인 정 교수는 21일 인터뷰에서 “국가정책을 위한 목표와 전략이 없다면 국민안전 없는 안전예산 확대에 불과하다”면서 “현장인력에게 가장 필요한 예산항목이 무엇인지 의견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김대중 정부는 벤처, 노무현 정부는 일자리, 이명박 정부는 녹색 등 정부시책에 따라 제목만 바꾸는 예산편성이 기승을 부렸다”며 “중요한 건 ‘호박에 줄긋기’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안전을 국정목표로 강조했는데도 실제 올해 예산에서 관련 예산이 오히려 줄어든 이유를 되짚어야 한다”면서 “지시만으로 이뤄지는 정부정책은 없다”고 꼬집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정부예산안 기준으로 신규사업은 2013년 0.9%, 2014년 0.6%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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