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이폰이 고장이 났습니다. 제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이폰(그냥 핸드폰이 아니고 아이폰!)에 고장이라니. 그 자체로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배터리 부족으로 전원이 꺼진 아이폰을 충전했는데 세 시간이 지나고 네 시간이 지나도 켜지질 않는 겁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충전 자체가 안되는 일도 있다는 글도 있더군요.
아이폰 블랙아웃
사실 저로선 휴대전화가 불통이라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장 편집국 내부망에 로그인할 수가 없습니다. 로그인하려면 휴대전화로 인증번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업무 마비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더 황당한 건 아이폰이 고장 났을 때 어디 가서 애프터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지 막막하더라는 것이지요.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봐도 정확한 애플이 운영하는 서비스센터 위치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계속 충전기를 연결해놨는데도 충전이 안 되자 새벽에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충전기를 빼놨습니다. 이걸 고치러 어디로 가나 뒤척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폰을 켜보니 에구머니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만 켜지는 겁니다.
그렇게 제 나름 ‘블랙아웃’ 사태는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사태 원인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저는 여전히 아이폰 잘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딜 찾아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한마디로 출구도 없고 퇴로도 없는 상황에서 제가 느껴야 했던 당황스러움과 막막함은 잊히질 않습니다.
터널이론
‘터널 이론’이란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터널 한가운데에서 길이 막힙니다. 차 안에서는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교통체증이려니’ 생각하면서 길이 뚫리길 차분히 기다립니다. 그렇게 모두 조금씩 참으며 터널을 빠져나갑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차선은 차들이 꼼짝도 않는데 옆 차선은 차들이 쭉쭉 빠져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엔 ‘우리 차선도 곧 뚫리겠지’하며 기다립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인내심은 바닥나고 끼어들기를 시도하겠지요. 그렇게 터널 안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터널 이론’은 소득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가 공동체 정신을 파탄 낼 수 있다는 경고라고 합니다(사회붕괴의 징조). 사회가 유지되려면 옆 차선보다는 느리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자기 차선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면, 다시 말해 ‘출구’가 없으면 교통규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Alexandre Breveglieri (CC BY)
복지정책의 출발점
복지정책이란 게 처음 시작은 출구를 만들어주자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고양이를 무는 쥐가 되지 않도록 말이죠.
복지는 곧 시혜이고, 남는 밥 던져주는 ‘잔여’였지요. 복지가 ‘시민권’이 되고, 인권이 되고, 국가의 의무가 된 것은 대략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투쟁 끝에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나서부터겠지요. 한국은 여전히 ‘복지=적선’이란 인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선 차관이라는 사람이 ‘이건희 손자가 무상보육 혜택 받는 게 공정사회에 부합하느냐’는 말이 큰 호응을 얻습니다.
이건희 손자가 복지 혜택받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뒤집어보면 ‘복지는 가난한 사람들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게을러지지 않도록, 죽으라 일하도록, 딱 굶지 않을 만큼만 해주는 게 곧 복지라는 것이겠지요.
물론 요새 무상급식 반대하고 무상보육 반대하는 분들이 쓰는 논리는 10여 년 전에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반대 논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결과로, 진주의료원 환자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었습니다. 만약 진주의료원이 중산층도 자주 이용하는 병원이었더라도 (이름을 입에 담는 것도 불쾌한) 홍모씨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해산시켰을까요? (위기에 빠진 공공의료)
이건희에게 기초연금을! 이건희 손자에게 무상급식을!
이건희 손자까지 무상급식을 해야 하느냐?
예. 저는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희 손자도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무상의료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건희도 기초연금을 받아야 합니다. (기초연금 둘러싼 논란은 여기 국민행복연금 도입과정에서 사라져버린 핵심 세 가지)
이건희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복지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마을잔치를 위해 쌀이나 돈을 추렴할 때는 각자 형편에 따라 쌀과 돈을 내놓지만, 잔칫상은 똑같이 나눠 먹는 거 아니겠습니까.(보편복지를 위한 보편증세)
이건희 손자들이 복지 서비스를 받게 되면 복지 서비스도 그에 맞춰 최소한 ‘격’이 올라갈 테니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저소득층만 이용하는 공공병원이 아니라 삼성병원 같은 공공병원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만 해도 유쾌합니다.
이건희 손자들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식판에 같은 반찬으로 무상급식을 받는다면 그들은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특권의식이 아니라 ‘우린 같은 밥을 먹는다’는 공동체 의식을 교육받을 수 있을 테고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건강한 시민이 될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게 세 번째 이유입니다.
세금 얘기만 나오면 ‘뜯기는 것’으로 생각하며 발작증세를 보이는 분들도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무상급식을 먹던 추억’을 간직하며 ‘그게 다 우리 아버지가 세금을 더 낸 덕분’이라고 떠올린다면 발작증세도 없어지고 부자지간에 사이도 더 좋아지겠죠. 무엇보다도 머지않아 ‘우리 반에서 우리 아빠가 돈 제일 많이 번다’가 아니라 ‘우리 아빠가 우리 반에서 세금 제일 많이 낸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훈훈한 광경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러려면 세금달력도 필요하겠지)
출구가 없는 사회는 붕괴 위험에 직면한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구를 만들어 줘서 내가 서 있는 차선도 터널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적절한 교통 조치를 통해 차선 간 불균형을 해소해주면 자연스레 양보운전도 하고 사고위험도 줄어들겠지요. 그렇게 다 함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터널에서 교통사고로 불나면 다 죽습니다.
슬로우뉴스(http://slownews.kr/11682)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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