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5월31일 19시55분에 베를린행 기차가 출발했다. 처음 이용해보는 유레일패스다. 1박2일이 걸리는 여행길이다보니 침대칸도 이용하게 됐는데 좀 좁긴 했지만 이용하기 불편하진 않았다.
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란 말이 있다. 기차에서 나는 정년퇴직한 노부부를 만났는데 영어가 가능한 할아버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자신은 독일인이고 부인은 헝가리인인데 부다페스트 인근에 있는 처가에서 열린 무슨 가족행사에 참가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 할아버지는 흥미롭게도 기자, 그것도 음악전문 기자를 했는데 윤이상 인터뷰를 했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인터뷰 기사에서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 동양적 정신을 서양 음악에 잘 융화시킨 음악이라 평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인은 다리가 불편한 듯 목발을 짚고 있었는데 좌석은 2층 침대칸이었다. 내 자리인 1층 침대칸과 바꿔줄 수 있다고 하자 매우 고마워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선 노인을 공경하는 건 지금도 매우 중요한 도덕규범이란 얘길 해줬는데 이들은 예전엔 독일도 그랬다면서 수십년 전부터 문화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며 아쉬워했다.(그래도 독일에선 나이를 면책특권 삼아 테러를 일삼는 '어버이'들은 없으니 피장파장 아니겠는가)
이들은 송두율 교수가 한국에서 수년전에 정치적 이유로 구속됐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송 교수가 지금은 베를린에 살고 있다고 했더니 그건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우리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얘길 나눴다. 나는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대해, 그는 나치에 대해.
베를린 중앙역에 아침 9시9분 도착했다. 노부부가 출구를 알려주면서 즐거운 여행을 기원해줬다. 그들은 라이프치히에 집이 있기 때문에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베를린에선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5박6일을 지냈다. 우연하게도 민박집은 '체크포인트 찰리'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베를린장벽은 우리로 치면 판문점 같은 곳이었다. 미군이 관리하던 이 곳에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에서 왕래하던 사람들이 신분증을 제출하고 통과해야 했다. 찰리는 군대용어에서 A, B, C를 지칭할때 쓰는 알파 브라보 찰리에서 딴 말이다.
지금도 체크 포인트 찰리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미국 국기도 걸려있고 미군 복장을 한 '알바'들이 당시 경계를 서던 미군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이들은 관광객들과 기념촬영도 해준다. 검문소 바로 옆쪽에는 대형 맥도날드 매점이 자리잡고 있다. 미군이 관리하던 체크포인트 찰리와 빅맥...
빅맥 옆으로는 이탈리아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도 있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었다. 맥주도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파게티를 먹는건 정말이지 기분좋은 경험이다.
식당에 들어가자 사장님이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한다. 주문을 영어로 했다. 답변은 이탈리아어로 돌아온다. 아무렴 어떠랴. 맛있는 음식을 먹은 걸로 만족. ^^
동베를린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다. 분단 시절 서베를린은 동독 한가운데 있는 서독 영토였고 미국, 프랑스, 영국이 통제하던 곳이었다. 다시 말해 서베를린에서 유학하던 한국학생들은 육로로 서독으로 가려면 동독땅을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송두율 교수한테 듣기로는 본의 아니게 적성국을 '잠입탈출'한 것으로 오해받을까 우려해서 유학생들은 동독을 거쳤다는 걸 여권에 표시하지 말아달라고 당국자에게 요청하곤 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독일어: Die Berliner Mauer)은 냉전과 독일 분단을 상징한다. 1961년에 처음 생긴 이래 1989년 11월 9일 자유 왕래가 허용된 이후 차례로 붕괴되었다.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베를린 시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주독 한국문화원 바로 앞에도 베를린장벽 흔적이 남아있다. 누군가 장벽에 벽화를 가득 그려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