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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

반전평화운동가가 된 9.11테러 유가족 이야기

by betulo 2011.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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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911일 아침 집에서 커피를 마시던 데이비드 포토티는 어머니한테서 전화를 받고서야 뉴욕 쌍둥이빌딩 북쪽 건물 95층에서 일하던 친형 짐에게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걸 알았다. 그는 그날 하루종일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9·11 테러범들이 테러에 이용한 첫번째 여객기를 짐이 일하던 바로 그 층에 들이받았다는 걸 알았다.


 십중팔구 형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직장 동료 300여명과 함께 즉사했겠지요. 20024월에 작은 뼛조각을 유전자검사한 한 끝에 형의 사망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 우리는 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채 지내야 했습니다.”


포토티 가족사진. 가운데가 데이비드 포토티, 맨 오른쪽이 짐 포토티.


이메일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자신에겐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고 말했다. 전세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방위비로 하루에도 수십억달러씩 쓴다는 정부는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정부는 유가족들과 대화도 거부한 채 사건 원인조차 침묵했다.


엄청난 분노를 느낀 그는 미국 정부가 외국에서 벌이는 일에 대해 미국인들이 더 이상 무관심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세계사와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각종 책을 파고들었다.”고 했다. 그는 점차 반전평화운동가가 됐다. 그가 보기에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를 뿐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공습을 하고 마을을 점령하는 것은 극단주의만 강화시킬 뿐이고 미국을 더 위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2001년 말 워싱턴에서 뉴욕까지 치유와 평화를 위한 행진을 벌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2년에는 200여 유가족들이 모여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유가족회(http://peacefultomorrows.org/)’를 만들었다. 하지만 9·11 유가족들의 눈물을 명분삼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는 정작 이 단체의 목소리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입장에서 그는 전임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가 보기엔 최근 미국이 겪고 있는 막대한 정부부채 위기도 결국 전쟁이 주된 원인이다. 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모든 폭탄은 결국 학교건물이나 병원을 짓는데 써야 할 예산에서 훔친 장물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유가족회는 지금도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비폭력과 평화를 호소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평화교육을 실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단체 설립 초기 사무국에서 일하던 포토티도 지난 2003년 참여연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3년 방한 당시 강연 전문: http://www.peoplepower21.org/565756


 그는 나에게 9·11 10주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9·11은 그저 언제나 똑같은 9·11일 뿐이다.”고 털어놨다. 그는 해마다 이맘때면 슬픔과 두려움, 분노로 뒤섞인 격한 감정이 시도때도 없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제 이런 감정은 삶의 일부가 돼 버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뼈 한 조각으로만 남은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어머니가 들려줬던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며 슬픔을 이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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