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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순회특파원(2011)

스페인 재정위기? 그 위기설의 실상과 허상

by betulo 201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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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내 머리를 맴돈 것은 스페인 ‘경제위기설’이었다. 과연 얼마나 심각할까. 잠시 1997년 한국이 겪었던 외환위기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드리드에 도착한 뒤 받은 첫인상은 선입견을 철저히 배신했다.

분명 스페인은 언제 위기에 빠질 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마드리드에서 만난 이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힘들긴 하지만 잘 이겨낼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경제지표는 확실히 좋지 않다. 코트라 마드리드 지사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실업률 추정치는 19.5% 이른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실업자라는 얘기다. 마드리드 시내에서 만난 대학생 호세 로드리게스는 “내 주변에 있는 졸업생 가운데 취업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라면서 “나 역시 졸업하고 나면 곧바로 실업자가 될까 두렵다.”고 털어놨다.


 무역수지는 531억달러 적자다. 높은 실업과 긴축재정으로 인해 소비가 얼어붙었다. 그나마 주변국 경제회복에 힘입어 지난해 산업생산과 수출이 늘어난 것이 위안이다. 스페인 정부 역시 허리띠를 졸라매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7월 부가가치세를 16%에서 18%로 인상했고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 400유로 근로소득세 환급제도를 폐지했다.

스페인 정부는 지난해 5월과 12월 각각 150억 유로와 144억 유로에 이르는 강도높은 긴축재정을 추진했다. 공무원 임금을 10년간 5% 삭감하고 2500유로에 이르는 출산장려금 지원을 중단했으며 주요공항 운영권을 민간에 이양했다. 장기실업자 보조금도 지난 1월 폐지했다.


 스페인 위기설에 대한 경보음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21일 스페인이 여전히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일각에선 스페인 정부의 긴축 조치와 심각한 실업에 항의해 20만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지 이틀 만에 보고서가 나왔다는 ‘시점’을 주목하기도 했다.


 적잖은 전문가들이 스페인의 상황이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나 아일랜드와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위기설’을 배격한다. 실제 지난해 10월에는 IMF도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전년도 0.3% 적자보다 호전된 0.7% 흑자로 전망했다. 유럽연합 역시 지난 2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0.7%로 예상했으며 지난해 12월 OECD는 0.9%로 추정했다.


 시민들의 표정도 별다른 그늘을 느낄 수 없었다. 일부러 길을 물으며 말을 붙였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는 너무 친절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시민들은 여유가 넘쳤고 곧 있을 여름 휴가 한 달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실질구매력(ppp) 대비 GDP 수준만 놓고 보면 한국과 스페인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삶의 여유면에선 하늘과 땅 차이가 느껴졌다.


 한 마드리드 시민은 경제상황이 어려운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국제투기꾼들과 금융회사들이 자꾸 ‘위기가 다가온다’는 식으로 위기를 부채질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어떤 이는 기자가 영국을 거쳐 마드리드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힘들기는 영국 친구들이 더하지.”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스페인과 영국의 공공요금 등 체감경기를 비교해보면 선입견은 당장에 배신당한다. 런던 지하철 기본요금은 4파운드지만 마드리드에선 1유로였다. 그나마 런던은 구간에 따라 요금이 급격히 늘어나지만 마드리드는 그조차 없다. 런던의 인터넷 사정이 유럽에서도 최악이라는 것은 런던 시민들조차 인정할 정도다. 기자가 머문 런던 호텔에선 24시간 인터넷 요금은 12.95 파운드나 됐지만 마드리드에 있는 호텔에선 4유로를 요구했다. 물론 자료전송속도만 놓고 보면 마드리드가 런던보다 8배 가량 빨랐다.


 영국의 대표적인 가격비교 웹사이트인 머니수퍼마켓(Moneysupermarket)이 지난달 공개한 조사결과를 보면 지난 6개월간 영국 가구 평균 공공요금은 1주일에 54파운드나 늘었다. 전문가들은 가구당 연평균 500 파운드의 에너지 요금 인상을 전망한다. 런던에서 4명이 공동으로 기거한다는 대학생 마틴 웹은 “지난 1분기 전기요금이 500파운드나 나왔다.”며 울분을 토했을 정도다. 거기다 올해 1월 보수-자유민주 연립정부는 선거공약과 정반대로 17.5%였던 부가가치세를 20%로 전격 인상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왜 ‘스페인 위기설’은 지난해 2월 초 이래 되풀이되는데 ‘영국 위기설’ 얘기는 들을 수가 없을까. ‘위기설 담론’을 누가 생산하는지가 실마리가 될 것이다. 스페인 위기설의 진원지는 미국과 영국계로 나뉜 3대 신용평가회사, 미국에 본부를 둔 IMF와 세계은행,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에 기반한 투자은행과 헤지펀드 등 금융회사 등이다. 거기다 미국과 영국 주요 언론들은 유로화가 생기기 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유로화의 ‘태생적 한계’로 인한 ‘붕괴 위기설’을 전파해 왔다.


 미국이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심각한 위기에서 잠시 숨을 돌린 2009년 말부터 국제사회에선 본격적으로 재정적자에 따른 일부 국가 위기설이 흘러나왔다. 스페인 역시 위기설의 포화에서 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등에서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하는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를 수치로 비교해보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지난해 기준 영국의 GDP 대비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는 각각 10.4%와 80.0%였다. 미국은 연방정부와 주정부를 합해서 지난해 재정적자는 10.8%, 정부부채는 99.5%나 됐다. 이에 반해 올해 스페인의 GDP 대비 재정적자와 정부부채는 6.7%와 68.7%로 영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재정적자에 따른 위기’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를 순전히 ‘내 탓이오’로 기억하는 마음으로 스페인에 대해서도 ‘네 탓이오’라고 단순하게 여기고 마는것은 아닐까.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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