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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순회특파원(2011)

장하준 교수한테서 듣는 '영국 경제 제4의 길'

by betulo 2011.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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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에 대응하는 방식은 거칠게 말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미국에 본부를 둔 IMF가 한국에 권고(혹은 강요)했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자체적으로 했던 방식이다.

전자는 고금리에 구조조정, 기업 퇴출과 노동자 정리해고로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나는 군대에서 분대장이었는데 고통분담한다며 사병 월급까지 깎였다. (하다못해 건빵과 맛스타마저 끊기는 그 비극이란...)

그걸 강요했던 미국이 자기네들 위기에 대응한 방식은 어떠했을까. 저금리에 망하기 일보 직전인 은행들을 살려냈다. 퇴출을 막기 위해 막대한 구제금융을 쏟아부었다. 물론 대규모 정리해고도 없었다.

미국은 어떤 분들에겐 워낙 착한 나라니까 국민들에게 착한 정책을 썼을 것이다. 혹은 어떤 분들에겐 워낙 잘난 나라니까 국내 문제에 대해 똑똑한 처방을 내렸을 것이다. 나처럼 미국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뭐든 하는 나라라고 보는 사람에겐 미국은 1997년이나 2008년이나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다만 두 경우 모두에서 미국이 하는 일이 모두의 이익이라는 점을 내세웠고 그게 먹혔던 걸 보면 역시 세계를 호령하는 나라다운 말빨(담론전략)이 느껴진다.)

그럼 2011년 영국의 모습은 어떨까? 처음엔 미국처럼 움직이는 듯하더니 요즘은 외환위기 당시 한국처럼 움직인다. 왜 그럴까? '케인스 처방'으로 유명한 케인스의 고향인 영국이 말이다. 그 궁금증을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한테 물어봤다.

6월23일 전화인터뷰로 했다. 사실 런던 방문했을때 꼭 찾아뵙고 싶었지만 일정이 도저히 맞질 않아서 아쉽다. 다음번엔 꼭 대면인터뷰를 하고 싶다.



문: 영국 정부가 선거당시 감세공약에도 불구하고 부가가치세를 2.5%포인트 인상했다. 


-선거에선 감세를 한다고 했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까 결국 증세를 택했다. 명분은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려면 소득세를 인상해야 했다. 소득세 인상은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에 배치되니까 간접세만 올리면서 서민 부담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감세 공약이란 건 언제나 선거에서 인기를 끌기 위한 목적과 함께 이데올로기가 뒤섞여 있다. 그 어느 국가도 감세를 해서 실제로 경제가 좋아진 곳은 없었다. 오히려 세금 줄여서 기반시설 관리할 돈이 부족해지면 영국처럼 되는거다.


문: 공공요금 인상과 복지예산 삭감이 경제회복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영국에선 사실 공공요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민망하다. 전기 가스 지하철 모두 민영화됐기 때문이다. 이 요금들이 전반적으로 급증하는건 분명하다. 거기다 복지예산 삭감까지 겹치면서 앞으로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

공공요금 인상과 복지예산 삭감은 사실 자해나 다름없다. 4월부터 본격적으로 본격적으로 복지예산 삭감해서 이제 시작단계다. 앞으로 영국인들은 점점 더 많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미 2008년 이후 영국은 생활수준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젠 GDP 국가별 순위에서도 프랑스에 밀려 6위로 떨어졌다.


문: 영국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강조하는데.

-현 영국 정부는 과거 노동당이 방만하게 재정을 펑펑 써서 이렇게 됐다고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재정적자의 원인은 금융위기로 은행이 무너지면서 막대한 구제금융을 조성하는 한편, 경기침체로 세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입은 줄고 지출은 급증해서 지금처럼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자를 줄인다며 정부재정을 조이게 되면 소비가 위축돼 경기가 더 안좋아지고 정부수입은 늘어날 수가 없다.

케인즈가 얘기했던 교훈을 떠올려야 한다. 경기하강 국면에선 정부가 돈을 풀어서 소비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 한마디로 현재 영국 정부는 병을 잘못 진단한 의사나 다름없다.


문: 빈약한 제조업 기반 때문에 실업 문제 해결도 어려워지는 것 같다.

-영국은 1980년대부터 탈산업화란 이름으로 금융과 서비스산업에 주력했다. 그 결과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이 세계 20위권으로 떨어졌다. 결국 1980년대 이후 영국의 고용은 금융 규제완화로 인한 금융팽창과 거기서 나오는 세수를 이용한 사회서비스 확대에 기반했다.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로 금융이 찌그러지니까 일자리가 나올곳이 없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지출을 삭감하면 공공부문 일자리 줄어들어 실업률이 더 심각해지게 된다.


문: 등록금 3배 인상이 중장기적으로 영국 국가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영국은 대처 총리 당시에도 대학 등록금이 없던 나라였다. 등록금이 생긴 건 2000년대 초반에 1000파운드 가량 신설한게 처음이다. 영국에서 등록금 문제는 21세기 들어 새로 생긴 현상이다. 무상 등록금이 좋은지 나쁜지 논쟁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계약이라는게 있는거다. 하루아침에 값을 세배나 올리는게 세상에 어디있나. 가령 10년 동안 세 배로 올린다거나 하는 식이라면 모르겠지만 재정적자를 핑계로 자기들 독단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영국은 가뜩이나 가난한 지역 공립학교에선 공부 열심히 하면 왕따시키는 문화가 있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이 안되기 때문에 대학에 뭐하러 가느냐 하는 정서가 강하다. 지금도 케임브리징에서 40% 가량은 사립학교를 나온 상류층 출신이다. 옥스퍼드는 더 심하다. 앞으로 고등교육을 통한 ‘신선한 피’ 공급이 더욱 어려워지고 상류층 자제들만의 ‘동종교배’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본다.


문: 사회당이 집권중인 스페인의 경우는 어떤가.

-지난 20여년 동안 유럽 사민주의 정당은 굉장히 우경화됐다. 영국의 경우만 해도 노동당이나 보수당의 차이점은 금융 규제완화로 생긴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더 많이 도와주느냐 덜 도와주느냐 차이에 불과했다. 그 점은 스페인 사회노동당도 다르지 않다. 지금같은 상황에선 어지간히 비전 있고 자신감 있지 않으면 소신껏 정책을 펴기가 쉽지 않다. 스페인도 명분으론 사민주의라고는 하지만 당장 국채 발행 이자율 문제 등으로 어떻겍든 해결을 해야 하니까 차별성을 보이기 힘들다.


문: 최근 재정적자가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간주하는 분위기가 있다.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라고 본다. 한국 독자들에게 분명히 언급하고 싶다. 자본시장이 ‘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위기를 먹고 산다. 대처 총리가 ‘영국병’에서 영국을 구했다는 선전과 똑같은 맥락에서 영국은 괜찮고 스페인은 오늘내일 하는것처럼 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자꾸 주요 언론을 장악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떠벌이며 대중들을 호도한다.

영미권 사람들이 옛날부터 세계를 지배해서 자기들과 다른건 저급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걸 꿰뚫어봐야 한다. 최근 스페인 경제가 어려운 건 방만한 재정운용 때문이 아니라 금융자유화와 은행 규제완화, 부동산 투기붐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은 그 많은 빌라와 콘도를 산 것은 영국 부유층들이었다는 건 왜 지적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제목을 처음엔 '영국 경제가 망하는 길'로 했는데 마음에 참 안들었다. 장하준 교수가 표현한 '자해'라는 단어나 그런 의미를 담고 싶은데 너무 자극적인 것 같아서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제4의 길'이란 말이 문득 떠올랐다.

블레어 전 총리가 내세웠던 '제3의 길'을 빗댄 표현인데 사실 '망하는 길'과 같은 맥락에서 '제사지내는 길'이라는 뜻에서 '제4'라고 썼다. 나름 중층적인 의미를 담아보려 했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어떨지 모르겠다. 강호제현의 조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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