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가 밝힌 자신의 금언을 패러디해서 말한다면, 예산과 관계된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예산’을 삶에 와닿는 주제로 만드는 기사를 쓰는 방법을 자주 고민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린 첫 번째 원칙은 이런거다. “36.5도로 시작해 18도로 마무리하자.” 36.5도는 심장의 온도이고 18도는 두뇌활동 최적온도라고 한다(내가 사랑했던 한겨레 섹션 18도에서 영감을 얻었음을 밝힌다). 좀 더 통속적으로 풀어보자면 “뜨거운 가슴으로 시작해 냉철한 이성으로 마무리짓자.”가 될 것이다.
예산을 주제로 한 ‘좋은’ 글을 쓴다는 건 간단치 않다. ‘그 분’이 날마다 오시는 것도 아니다. 관련 통계와 자료를 뒤져 전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가끔 자료마다 예산액이 달라서 애를 먹이기도 한다. 그래도 뒤질 자료가 있는 건 다행이다. 그런 자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된 셈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큰 그림을 그린 다음엔 현장을 파고 들어야 한다.
안개 속에서 존재하던 숫자들은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와 구체적인 ‘우리 문제’가 된다. 그런 책이 바로 <프리런치: 내가 낸 세금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할 수 있다.
고백하건데 나는 언제나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데이비드 케이 존스턴기자가 쓴 <프리런치>는 눈에 보이는 예산낭비를 넘어 예산이 특정한 집단에게 편중됨으로써 발생하는 다양한 폐해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민영화와 위탁, 세금감면, 각종 보조금 등을 통해 정부예산을 우리 모두의 재산이 아니라 그들의 쌈짓돈으로 만들어 버리는행태를 하나씩 하나씩 파헤친다.
왜 공짜점심일까. 먼저 주목할 건 공짜점심을 먹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낸 밥값으로 값비싼 점심을 공짜로, 그것도 거들먹거리며 먹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당연히 막대한 예산낭비와 특혜, 도덕적해이가 뒤따른다. 여기서부터 이 책의 미덕이 빛을 발한다. 단순히 수치를 통해 보여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생생한 현장 사례를 끄집어낸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시민들과 특혜를 받는 부자들의 목소리가 가감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산이란 건 언제나 단순한 돈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의 최전선’이요 ‘정책의 최전방’ 자리에는 언제나 예산이 버티고 있다. <프리런치>도 그 점을 집중거론한다. 바로 수십년째 미국을 넘어 세계에 위용을 떨치고 있는 시장근본주의(신자유주의)다. 수십년 동안 미국 정부는 규제를 완화하고 세금을 깎아주고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프리런치>는 상위 0.1%에 속하는 30만 명의 소득이 하위 절반에 해당되는 1억 5000만명의 소득을 합한 액수와 비슷하다고 비판한다. 부실한 건강보험 덕분에 비타민과 영양제가 동이 나고 출산을 위해 병원에 하룻밤 입원하는 비용이 2000만원이나 된다. 대다수 현대 국가경제에서 의료보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수준인 반면, 2007년 미국 경제에서는 6분의 1 정도 자금이 의료보장을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최근 건강보험 개혁에 얼마나 반대가 극심했는지 기억해보라.
<프리런치>에서 소개하는 사례는 하나같이 유력한 ‘밑빠진독상’ 후보자들이다. 의회가 예산을 꾸준히 삭감하는 바람에 대학 졸업자의 2/3가 부채를 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현재 미국의 학자금대출 규모는 연간 약 850억 달러나 된다.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이 되던 공원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경기장이 들어선다.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인근의 영세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대형 쇼핑몰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다. 구단주와 대형 쇼핑몰 소유주는 막대한 정부예산을 보조금을 지원받고 이자도 저렴하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한국이 달려가는 곳이 바로 이 책이 묘사하는 세상은 아닐까.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자. 미국이 걸어갔던 그 길을 고집스레 따라가고 있다. 정작 미국에선 이게 아닌데 하며 건강보험을 개혁하고 금융규제를 준비하는 등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한국에선 걸핏하면 건강보험 민영화와 감세정책, 공기업 민영화가 화제에 오르고 규제 때문에 경제가 안된다는 선전선동이 난무한다.
199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을 만나본 뒤 “주체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고 실망했다.”는 ‘명언’을 남긴 ‘강철’ 동지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번역한 옥당 출판사가 보도자료에서 “이 책은 미국의 정책을 좇고 있는 한국의 정치입안자들과 기업인들이 눈여겨보고 정책수정에 반영해야 할 ‘실사 보고서’이자 내 돈 내고 제 권리 못 찾고 있는 순진한 국민들을 위한 ‘예방백신’이다.”이라고 밝힌 게 과장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을 쓴 데이비드 케이 존스턴은 뉴욕타임스 기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그가 쓴 전작이라는 <퍼펙틀리 리걸Perfectly Legal>, 그러니까, ‘완벽한 합법’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이자 탐사기자 및 편집인협회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은 왠지 <프리런치>의 자매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하루빨리 국내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저자는 책 말미 ‘에필로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정부가 경제만 외치는 후과를 꼬집는다. “젭 부시 주지사의 임기 중 플로리다는 190억달러의 주 세금을 감면했지만 220억달러를 차입했다. 이제 플로리다 주민들이 그 차입금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야만 한다.”면서 이런 일들이 연방정부와 주정부 정책초점이 ‘경제’에 맞춰져 있는 동안 일어났다고 꼬집는다. 미국 정부는 “지난 25년 이상 정부는 최대 목적이 경제적 이득인 양 행동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도자들의 시야에서는 국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저자의 외침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결국, 정부가 제대로 일하도록 그리고 헌법 서문에서 한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들 사람은 바로 국민들이다. 국민을 대신해서 그렇게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개혁은 바로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시민들은 수십년 동안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나서왔다. 하지만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정부가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국회가 예산을 어떻게 편성하는지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국민을 대신해서 그렇게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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