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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사통팔달 백악관 집무실, 고립무원 청와대 집무실

by betulo 2010.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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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노무현이 ‘웨스트 윙’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즐겨 봤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에 나도 그 드라마를 구해 볼 기회를 갖게 됐다. 감상평을 한 마디만 한다면 ‘왜 노무현이 이 드라마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정도 되겠다.

웨스트 윙이란 백안관 서쪽 구역을 말한다. 대통령 참모진들이 일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짐작하셨겠지만 백악관 참모들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드라마는 토론으로 시작해 토론으로 끝난다. 백악관 비서실장까지 포함해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론을 벌이고 대화를 나눈다. 거기에는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 토론 속에 정책이 담겨 있고 가치관이 담겨 있다. 물론 재미까지.

드라마를 유심히 보면서 생각해봤다.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내 눈길을 끈 건 대통령 집무실이라는 공간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 문이 여러개가 있다. 비서실장과 바로 문이 이어진다. 대통령은 언제라도 필요하면 문을 열고 비서실장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비서실장 사무실은 조금만 움직이면 참모진들 사무공간과 곧바로 이어진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또다른 문은 복도와 연결되는 듯 한데, 이 복도도 백악관 참모들 사무공간과 이어져 있다. 대통령이 이 복도를 걷다가 참모와 마주쳐 이런 저런 얘길 하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다. 바깥으로 바로 이어지는 문도 있다. 대통령은 관저에서 회랑을 지나 곧바로 집무실로 들어간다.

대통령이 백악관이라는 공간에서 중심축에 위치한다. 대통령은 필요하면 언제라도 참모들을 불러 ‘토론’을 할 수 있다. 백악관이라는 공간 자체도 시민들에게 열려 있어서 왠만한 집회라도 열리면 집무실에서 구호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런 공간구조를 강원도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에서 본 적이 있다. 몇 년전 ‘겨레하나’가 주최한 답사를 인솔하던 사진작가 이시우씨한테 듣기로는 철원군당 위원장 사무실은 1층에 있다고 한다. 노동당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철원 노동당사 최고 책임자 사무실이 있는 셈이다.

청와대라는 공간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직 대통령이 작년에 몇 번째인가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했던 말이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시민들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었다.”

왜 뒷산에 올라갔을까? 설마 대통령 집무실에선 노랫소리가 안들리는 건 아닐까?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안들릴 정도라면 대통령 집무실은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국민들한테서 고립된 공간이 아닐까.

그렇게 토론을 좋아했다는 노무현조차도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점점 토론에서 멀어져 갔던 기억이 난다.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실과 참모진 사무실을 아예 다른 건물에 배치했다고 한다. 참모들과도 만나기 쉽지 않으니 국민들 얘기 듣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전에 광화문 광장이 문을 열었다. 처음엔 순진한 맘에 광화문 광장이 생기면 청와대와 몇 백 미터는 가까워지니까 대통령 집무실에서도 아침이슬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봤다. 하지만 역시나. 광장에선 기자회견 못한다는 희한한 정부 방침이 나왔다. (도덕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북한에선 수령님 말씀이 헌법보다도 위에 있다고.)

앞으로도, 현직 대통령은 시민들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려면 힘들게 뒷산까지 올라가야 한다. 물론 대통령이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말이다. 그럴꺼면 광화문광장에 확성기라도 설치해 주는 게 ‘선진화’로 보나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나 맞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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