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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내가 만나본 리영희 선생님

by 자작나무숲 2010. 12. 9.



개인적으로 리영희 선생님을 딱 한번 뵈었다. 작년 겨울로 기억하는데 마포의 한 냉면집에서 리영희 선생님을 모시고 열린 조촐한 회식 자리였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뒤 재활에 온 힘을 집중하셔서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지만 한쪽 팔은 여전히 불편해 고향음식을 드시기 힘들어하셨다. 그래도 꿋꿋하고 정정하게 점심도 드시고 말씀도 분명한 어조로 하셨다.

내가 국제부에 있다고 했더니 리영희 선생님은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간 역사와 관계에 대해 전체적이고 균형있는 시각에서 훑어보실 것을 권하셨다. 특히 미국의 외교전략과 미국 자체에 대한 독서를 열심히 하는게 필요하다고 하셨다. 오랫동안 필력을 날렸던 국제부 기자로서 자부심과 노하우가 묻어났다.

그 전에 인권연대 송년회에 리영희 선생님께서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축사를 해주시며 짧은 강연을 해준걸 들었다. 1980년대 감옥에 갇혀 <레미제라블>을 읽었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장발장을 추적하던 쟈베르 경감이 드디어 장발장을 포위했다. 그런데 갑자기 체포영장을 발부받지 못했다며 부하들에게 다 잡은 장발장을 보내주라고 한다. "나는 영장도 없이 감옥에 갇혀 그 책을 읽고 있었는데..."

리영희 선생님께서  2010년 12월 5일 오전 12시 40분쯤 돌아가셨다. 비록 가끼이서 뵌 적은 몇 번 없지만 항상 배우고 싶은 선생님이셨다. 그 분을 기억하며 고은 시인의 시 한 수를 올린다.


리영희 - 고은 (만인보 12권 중)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

그래서 프랑스 신문 '르몽드'

그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사상의 은사'라고 썼다

결코 원만하지 않았다

원만하지 않으므로 그 결핍이 아름다웠다

모진 세월이 아니었다면

그 저문 골짜기 찾아들 수 없었다

몇번이나 맹세하건대

다만 진실에서 시작하여

진실에서 끝나는 일이었다

그의 역정은

냉전시대의 우상을 거부하는 동안

그는 감방 이불에다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하고

구매품 사과와 건빵 차려놓고

관식 받아 차려놓고

불효자는 웁니다

이렇게 세상 떠난 어미니 시신도 만져보지 못한채

감방에서 울었다 소리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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