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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판사님, 판사, 판사새끼

by betulo 2009.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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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검사, 변호사, 기자, 감사원, 의사... 일반인은 이런 명함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사적인 차원에선 알아둬서 손해는 없다. 친해두면 꽤 괜찮다.
공적인 차원에서 같은 편으로 만나면 든든하다.
공적인 차원에서 상대편으로 만나게 된다면 꽤 신경 쓰인다. 위험할 수도 있다.

소시적에 어머니께서 자주 하셨던 얘기가 있다. “평생 안가면 안갈수록 좋은곳에 세군데 있다. 병원, 경찰서, 감옥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 기자, 감사원, 의사 등은 모두 어머니께서 멀리하라고 하신 세 곳과 연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좋을 수 있는 곳이다.

일반인이 위 직업군에 대해 이중감정을 느낀다는 것도 주목할만 하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검사나 변호사가 도와준다면, 기자가 부조리를 폭로하는 보도를 한다면 ‘검사님, 변호사님, 기자님’이 된다. 아퍼서 병원에 간 사람은 무조건 ‘의사님’을 찾는다.

검사가 자신을 기소했다면? 수술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다면? 병원비가 너무 비싸다면? 자신과 관련해 안좋은 보도가 나온다면? 부당하다거나 지나친 판결이 나온다면? ‘님’은 ‘새끼’로 둔갑한다. 1초도 안걸린다.

판사는 “세금낼땐 가렴주구, 지원받을 때는 망극한 성은”과 비슷한 자리에 있다. 나는 살면서 판사를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접해 본 판사도 몇 명 되지 않는다. 다만 내게도 <판사님, 판사새끼>가 있다.

소시적에 즉심을 받은 적이 몇 번 있다. 이른바 ‘자살택’이라고 해서 잡혀갈거 뻔히 알면서 대놓고 기습시위를 하다 그리 됐다. 1994년으로 기억하는데 시내 한복판에서 경찰이 모여 있는 곳 바로 앞에서 보란 듯이 “5.18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특별법 제정” 등을 1분쯤 외치다 경찰들이 안내해준 닭장차로 시내 드라이브를 했다.

경찰들이 모셔다준 곳이 나중에 보니 서울 북부지법이었다. 판사가 앉은 자리는 꽤 높아 보였다. 판사 앞에 같이 선 친구들이 10여명 됐는데 다들 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내가 뭘 잘못했냐”는 식으로 나섰다. (사실은 아무리 세게 나와도 구류 이틀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객기를 부린거다) 

판사 반응이 흥미로웠다. 판사는 학생들이 하는 얘기에 십분 공감하지만 판사로서 뭔가 벌을 줘야 한다는게 꽤 괴로운 듯 했다.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그리 보였다. 가끔 얘기를 듣다 고개를 푹 숙이기도 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기억에 판사는 우리 모두에게 각 벌금 2만원 가량을 때렸다. 우리를 모셔다준 경찰들도 놀랄만큼 ‘약소한’ 금액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당시 ‘판사님’을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다. “판사님, 그때 우리 얘기 듣다가 왜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셨습니까?”

후자도 있다. 지금도 내 뇌리에 뚜렷이 박힌 건 송두율교수 1심공판 담당 판사였다. 검찰은 피의사실공표로 여론재판을 다 끝낸 다음에 송 교수를 기소했지만 정작 마땅한 증거는 없었다.

검찰측 증인이라는 사람은 “송 교수는 국내 주사파의 대부”라고 , 송 교수 책 다 읽어 봤는데 북한 비판하는 내용 없는 걸로 봐서 친북인사가 확실하다”는 흰 소리를 했다. 그 사람은 80년대 국내 주사파의 대부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송 교수가 쓴 독일어 책은 독일어를 몰라서 안 읽어봤다.

오래되서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 판사는 기소 내용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중형을 선고했다. 내게는 “큰 죄는 저지르지 않았지만 주사파 대부가 확실하고 책을 써서 주사파를 선전했으니 유죄”라는 논리로 보였다. 전문가들이 비판한 것도 대체로 그런 내용이었다.

법원이 순식간에 “제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고 외치는 ‘우정의 무대’가 돼 버렸다. “저희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아니면 말고” 1심 판결은 당시 2심에서 뒤집어졌다. 대법원은 2심을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 1심 판사는 지금도 법원에서 꽤 잘 나간다고 들었다. 2심 판사는? 승진 못해 그만뒀다고 한다.

어제 한미FTA ‘기밀’ 문건을 유출했다는 정창수 전 보좌관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다들 기대를 많이 했다. 하지만 판사는 1심의 내용을 유지하고, 항소를 기각했다. 싸부와 맥주 한 잔 할 기대로 모든 저녁 일정을 취소해놨던 나는 허탈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세상에는 판사님이라 불리는 사람도 있고 판사새끼라 불리는 사람도 있다. 내게 벌금 2만원을 선고한 판사는 판사님이었다. 그리고 송두율 교수 1심을 맡은 판사와 창수형에게 9개월을 선고한 1심 판사 그리고 항소를 기각한 판사는 적어도 판사님은 아니다. 그럼 요새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대법관 신영철은 ‘판사님, 판사, 판사새끼’ 가운데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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