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雜說

정치와 행정은 별개인가; 이달곤 장관을 보며

by betulo 2009. 3. 18.
728x90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일하는 이달곤이란 분이  4·29 국회의원 재선거가 치러지는 인천 부평 지역을 방문한 것을 두고 말이 많다. 이달곤은 3월 14일 인천 부평구 민방위 교육장과 노인복지회관 신축 공사장을 둘러보고 사업추진 상황도 들었다고 한다. 3월 11일에는 정창섭 행정안전부 제1차관도 인천 부평을 방문했다.

민주당이 반발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민주당 인천시당은 15일 “후보등록 30일 전에 선거관리 주무부서 수장이 방문한 것은 관권선거 논란을 피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냈다.

행안부에서는 “민생현장 방문의 일환이었을 뿐”이라며 “부평 방문은 선거와 무관한 부평갑 지역만 방문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지난해 18대 총선 당시엔 당시 경찰청장 어청수가 접전지였던 은평 지역을 방문한 것이 논란이 됐다. 당시 어청수도 지금 행안부와 비슷한 취지로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명했겠지.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렇게 발뼘했을거다.)

국가공무원법에는 정치운동금지 조항(65조)이 있다. 국가공무원법을 취재할 당시 만났던 맹주천 변호사는 그 조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선거때마다 논란이 되는 선심성 논란, 특혜논란 등을 이유로 지금껏 고위직 공무원이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느냐.”

정치와 행정이 별개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관권선거 논란이 잃어버린 10년을 거친 뒤 되살아났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관권선거였나 보다.) 논란이 될 때마다 나오는 해명은 언제나 정치는 정치고 행정은 행정일 뿐이라는 말이다.

지난주 대학원 수업 숙제로 냈던 리포트를 다시 꺼냈다. 정치와 행정은 별개라는 이론을 나름대로 비판해본 글이다. (욕하기도 지치니 학술용 글로 대체하련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에서 ‘대통령이 여의도를 불신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청와대조차 국회를 멀리 할 정도로 최근 국회로 상징되는 정치는 불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여의도 불신은 곧 행정부만이라도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19세기 미국에서 나타났던 개혁운동과 그 결과인 ‘정치행정 이원론’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미국에선 선거에서 이긴 쪽이 모든 공직을 독차지하는 이른바 ‘엽관주의’ 전통이 있었다. 엽관주의가 그 나름의 맥락과 또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운동가들에게는 혁파해야 할 구악(舊惡)으로 비췄던 것 같다.

당시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온 논리가 바로 ‘정치-행정 이원론’이었다. 정치와 행정은 다르다는 말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정치는 행정에서 관심 꺼라.”라고 외치는 선언처럼 들린다.

개혁을 위해 ‘정치논리’에 휩쓸리지 않는 행정부와 행정관료를 구성해야 한다는 설정은 공무원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공무원 정년제를 비롯한 각종 신분보장 조치가 이를 보장한다. 일부 정무직을 제외하곤 공무원들은 정규직으로 신분 안정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맡은 바 업무’에 종사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맥락이 썩 다르다. 60년대 이후 발전국가를 구축하던 정부는 이른바 ‘발전행정론’ 혹은 ‘새 일원론’이라 일컬어지는 행정체계를 가동했다.

민간영역, 시장과 시민사회가 극도로 저발전되고 총독부와 미군정에서 이어받은 강력한 행정조직과 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무력을 갖춘 정부가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고, 행정조직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기획원으로 상징되는 당시에는 국가가 행정과 정책결정이 하나였고 법안도 정부입법으로 추진하고 예산안도 정부가 입안했으며 사회갈등도 정부가 해결했다.

90년대 들어 정부가 산업정책을 사실상 폐기하고 발전국가에서 탈피한 와중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후 한국의 행정은 정치에서 스스로 거리를 둬 왔다. 혹은 거리를 둔다고 끊임없이 선언해왔다. 경제정책에서 ‘관치’는 과거 사회주의정책만큼이나 백안시된다.

정부가 규제를 한다는 말이 후진성의 상징처럼 돼 버렸다. 행정은 정책집행이나 해라. 정책결정은 정치에 맡겨라. 경제정책이나 심지어 복지정책까지도 이제는 시장이 알아서 할 것이란 외침이 전국에 울려퍼진다.

하지만 감세와 규제완화 구호로 등장했던 영국 대처 정부가 증세를 추진하다 실각했고 실제 세금규모가 줄어들지도 않았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정치-행정 이원론’은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기보다는 ‘선언’ 혹은 ‘당위’ 성격이 더 강하다. 청와대가 기업에 직접 전화를 해서 특정 시민단체 후원을 못하게 하는 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부가 국가인권위를 축소하려 하고 각종 과거사위를 개점휴업 혹은 폐업시킬 때 “그건 그저 효율적 행정을 위한 집행일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에서 예로 든 것들은 모두 정부가, 그리고 행정관료들이 벌이는 고도의 정치적 행동이다. 정부부처들이 나서서 4대강 정비사업을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것은 정치에서 유리된 채 집행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도의 정치적 행동을 하는 것일까.

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선심성예산안 편성 논란이나 선심성행정 시비는 행정과 정치가 한번도 멀리 따로 떨어진 섬이 아님을 시사한다. 정치-행정이 나눠져 있다는 ‘論’은 있어도 정치-행정이 나눠졌던 역사는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