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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생각한다/송두율 교수 사건

송두율 교수 옥바라지 정정희 여사 단독인터뷰(2004.4.1)

by betulo 2007.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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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교수 단죄는 학문자유 침해한 반민주 폭거”
[단독인터뷰] "7년징역형" 선고받은 송두율교수 부인 정정희씨
"남편 무죄 입증 때까지 당당히 싸우겠습니다"
 

2004년 4월 1일 오전 11시 51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사진은 당시 시민의신문에서 실었던 것입니다. 



지난 반년간 감옥에 갇힌 송두율 교수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한 부인 정정희씨. 남편과 함께 해외민주운동에 매진한 죄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던 그에게 한국 귀국은 또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정씨는 이제 독일에서 새로운 송 교수 구명운동을 벌인다.
 
“분단된 조국이 우리 가족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며 안타까워한 정씨는 “남편의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끝까지 당당하게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 국민들에게 “조중동이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국가보안법이 양심적인 학자를 감옥에 보낸다”며 한국 현실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난 20일 촛불집회를 방송으로 보면서 한국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다는 걸 느꼈다”며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11일경 독일로 돌아가는 정씨를 만났다.

-오늘 송 교수를 만나 어떤 얘기를 했나

△남편은 국가보안법에 맞서 당당하게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의연한 모습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남편은 언제까지나 한국에서 머물 수는 없으니 이제 독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11일 쯤 독일로 돌아갈 생각이다. 우리 식구는 분단된 조국에서 이산가족이 되는 셈이다. 남편을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린다.
 
-송 교수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남편은 건강이 좋지 않다. 고혈압, 천식으로 고생이 심하다. 거기다 밤새 켜놓는 형광등 불빛과 경비교도대가 문을 여닫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못 이뤄 수면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다. 10월에 60세가 되는데 환갑을 감옥에서 맞아야 할 것 같다. 그에 맞춰 책을 낼 계획이다. 조만간 집필을 시작한다고 들었다.
 
-가족들이 받은 충격이 클 텐데

△아들들은 평생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일이라고 말하더라. 작은 아들 린이는 요즘 남편 판결을 보도한 50여개 외신을 정리하느라 무척 바쁘다. 또 영문 보도자료를 팩스와 이메일로 외국에 보내 남편의 억울한 옥살이를 알리고 있다. 그것 때문에 잠도 잘 못자고 있다. 나는 선고공판이 있던 날 진정제를 먹고 재판을 방청했다. 눈물을 보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꿋꿋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진정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재판 중에 잠이 올 정도였다.
 
-독일 쪽 반응은 어떤가

△독일에선 한결같이 충격과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많은 독일인들은 이번 판결을 ‘증거도 없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 있을 수 없는 폭거’로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한국대사관 등에 항의전화를 한다고 들었다. 하버마스 교수와 뮌스터대 등 학계에서 특히 격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대책위가 지난달 31일 아침(한국시각)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성명서를 발표했다.
 
내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도서전 주빈국이 한국이다. 독일에선 저술활동을 이유로 감옥에 가야 하는 한국이 주빈국 자격이 있느냐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들었다. 최악의 경우 주빈국 결정을 취소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주한독일대사와 영사, 독일문화원장도 선고공판을 방청했다. 그들은 독일 시민권자인 남편을 보호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15년 구형과 7년 선고는 상상도 못했다. 독일 대사가 나에게 충격적인 일이라고 말하더라. 조만간 독일 대사관과 정부차원에서 어떤 식으로든 항의표시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법원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판결을 지켜보면서 검사와 판사를 구분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결문 마지막 부분은 검찰의 주장과 똑같더라. 판결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판결이다. 재판부가 내린 판결은 한국사회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고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한국이 과연 민주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곁에서 지켜본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
 
△남편은 너무나 착한 사람이다.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나를 동반자로 대해 줬다. 아들들에겐 이래라 저래라 시키지 않고 토론으로 결정하는 자상하고 민주적인 아버지였다. 독일에 ‘철학자 중에서도 철학자’란 말이 있는데 남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고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남편은 교수자격논문을 쓰고 나서도 러시아어를 많이 잊어버렸다며 러시아어 책을 펴들고 공부를 할 정도로 항상 학문에만 매진하는 학자였다.
 
항상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는 신문 부고란에 아는 사람 소식이 실렸다는 것까지 알고 있길래 내가 ‘신문 부고란까지 읽어보느냐’며 놀린 적도 있다.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요즘은 내 발등의 불이 너무 뜨거워 신문 읽을 시간도 없을 정도다. 독일에선 선거 때마다 녹색당을 찍었다. 비록 이번 총선에서 투표하진 못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수구세력이 꼭 몰락했으면 좋겠다.
 
-독일로 돌아간 후 활동계획은
 
△작년에 한국에 오기 전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요양을 하고 나면 복직할 생각이다. 큰아들은 일본에 있는 대학 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을 밟기로 했다. 둘째아들은 독일로 돌아가 레지던트 과정을 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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