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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베어벡 사퇴. 내가 언론인이라는게 부끄럽다

by betulo 2007.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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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얘기하는데 저는 축구를 잘 알지 못합니다. 1992년 월드컵은 대입준비 때문에, 1996년 월드컵은 이등병으로 전방근무하느라 단 한 경기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축구에 별 관심도 없어서 월드컵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월드컵을 처음 접한 건 1998년 월드컵 때 잠깐, 그리고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입니다.


다행히도 저는 제가 축구를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축구경기를 보면 언론보도와 사커월드, 토탈사커 등에서 ‘고수’들의 글을 탐독합니다. 솔직히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보다 ‘고수’들의 글을 읽는게 더 재미있을 때가 많지요.


베어벡 감독이 사퇴했습니다. 개인적으로 2010월드컵까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상관없이 ‘곰가방’ 감독이 계속 국가대표팀 감독이 남아있길 바랬습니다. 그만한 시간을 주고 기회를 줘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곰가방 감독 사퇴의 일등공신은 역시나 언론입니다. 두 번째는 축구협회겠지요. 세 번째는 ‘전문가’들, 5000만명이나 되는 ‘축구 전문가’들이겠지요.


끔찍합니다. 도대체 60년 동안 50명이나 되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갈아치우면서 우리에게 남은 게 뭡니까. 세계 4강?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한마디만 해주고 싶습니다. “꿈깨!”


과문한 제가 보기에 스포탈코리아를 제외하고 모든 언론과 ‘축구 전문가’들은 베어벡 물어뜯느라 이성을 상실했습니다. 비판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고질적인 수비불안’ ‘고질적인 골결정력’ ‘킬러 부재’ ‘뻥축구’를 외칩니다. 말이야 쉽지요. 하지만 제대로 된 분석은 역시나 과문한 제 눈엔 몇몇 기사나 ‘고수’들의 글 말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발끈하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적어도 베어벡은 일관성 있게 팀을 ‘새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언론과 ‘축구 전문가’들 역시 일관되게 움직였습니다. 경기가 있기 전에는 ‘정벌’ ‘필승’ ‘정복’이고 경기가 마음에 안들면 ‘감독 자질부족’ ‘경질론 대두’ ‘이번엔 국내감독’ ‘골결정력’ ‘수비불안’입니다.


다시 말하건데 베어벡은 팀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을 지난 1년간 벌여왔습니다. 1차적으로 그것은 곧 세대교체를 통한 수비조직력 구축입니다. 그게 되어야 그 다음 단계가 되겠지요. 본프레레처럼 3골이나 넣고도 4골이나 잃는 희한한 축구를 원하십니까?


이번 아시안컵에서는 4백 수비가 상당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언론이나 ‘축구 전문가’들도 수비불안 얘기할때는 예선전 3경기 얘기만 하고 주된 표적은 ‘골결정력’ ‘답답한 전술’ ‘무전술’을 외치더군요.


2002년 당시 한국팀은 4강전까지 6경기를 치뤘습니다. 득점은 6골이었습니다.(폴란드 2, 미국 1, 포르투갈 1, 이탈리아 2) 실점은? 3골이었습니다.(미국 1, 이탈리아 1, 독일 1) 16강전부터 4강전까지 득점은 2, 실점은 2입니다. 이번 아시안컵 6경기에서 득점은 3골, 실점은 3골입니다. 16강전부터는 득점 0, 실점 0이지요.


따지고 보면 2002년 월드컵에서도 득점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히딩크 말마따나 “골결정력은 브라질한테도 고민꺼리”지요. 그래도 4강까지 간 것은 탄탄한 수비조직력이 큰 힘이 됐습니다. 그걸 만들기 위해 히딩크는 ‘오대영’과 사퇴압력에 시달렸습니다. 아시안컵에서 보여준 빈약한 공격력을 무기삼아 베어벡을 찔러대는 이들은 왜 갈수록 탄탄하게 발전한 수비조직력은 말하지 않습니까.


(2002년 월드컵과 이번 아시안컵 비교 부분은 억지로 꿰어 맞춘 겁니다. 댓글사절.)


제가 보기엔 히딩크 할아버지가 와도 베어벡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둘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히딩크 1년과 베어벡 1년의 공통점을 되새겨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 더 기억을 떠올려보십시오. 2002년 1월 모두가 불안해 할 때 북중미컵에 참가하고 있던 선수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강해지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시안컵을 마치고 돌아온 어린 선수들이 하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우리는 이리도 인내심이 없을까요? 그리고 그렇게도 인내심 없는 이들이 왜 축구협회와 정몽준 축구협회장한테는 그렇게 인내심이 넘칠까요? 감독사퇴 요구를 쏟아내는 언론 어디에도 정몽준 회장[각주:1]보고 책임지고 사퇴하라는 말은 안할까요?


이제 새 감독이 오면 언론은 온갖 찬사를 쏟아내겠지요.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올 겁니다. 본프레레가 처음 부임했을때 빗속에서 빡세게 훈련시키는 걸 두고 언론이 "카리스마"를 외쳤던 걸 저는 기억합니다. 쿠엘류 감독 초기에는 이쁘장하게 생긴 쿠엘류 딸내미까지 기사 소재로 등장했지요. 그리고 한껏 띄워주며 판매부수 늘리겠지요. 그러다가 또 1년쯤 되면 새로운 사업영역 개척을 위해 감독을 물어뜯겠지요. 참 훌륭한 언론발전전략입니다.


짧지만 축구를 통해 즐거웠습니다. 비록 K리그 경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해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면서, 고수들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는 한국이라는 나라 국가대표팀과 관련한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싶습니다. 솔직히 그 나라 축구대표팀을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역겨워졌습니다.


한국이 강팀이라구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라구요? 언론과 축구협회, ‘축구전문가’들이 먼저, 그리고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베어벡 감독 사퇴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제가 언론인이라는 게 부끄러워집니다.”라는 한마디입니다. 


  1. 혹자는 그의 직업이 국회의원이라고도 하더군요. 그건 좀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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