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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자작나무책꽂이

와타쿠시(私) 죽여 오오야케(公)로, 그 뒤에 남는 건

by betulo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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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정책읽기 3-2> 이찬수, 2023, <메이지의 그늘>, 모시는사람들.

인권연대가 주최하는 ‘이찬수 교수의 메이지의 그늘’ 기획강좌 두번째 강좌(2월 7일)는 <천황교의 탄생, 오오야케(公)과 와타쿠시(私)>를 다뤘다. 공사 구분은 사회화의 척도이다. 공과 사 구분을 못하는 사람은 부패했거나 책임감이 없거나 못배운 사람이라는 질타를 받기 십상이다. 흥미롭게도 현대 일본의 뿌리인 메이지 시대의 그늘을 잘 보여주는 주제가 공사(公私), 일본어로는 오오야케와 와타쿠시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게 두번째 강좌의 주제다.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이나 중국에서 공(公)은 사회구성원이 모두 따라야하는 대표성이라는 의미와 함께 최고 권력자를 견제하거나 비판하는 상대화 가능성도 내포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오오야케와 와타쿠시는 대등하지 않다. 일본에서 ‘사’는 ‘공’에 종속돼 있고 ‘공’은 ‘사’의 은폐 혹은 희생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공과 사는 상대적이고 중층적이다. 오오야케도 좀 더 큰 영역에 비해서는 와타쿠시가 된다. 하지만 “국가 단위의 갈등과 다툼을 조정할 최후의 오오야케는 모호하다.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에서 보편적 양심의 근거나 암묵적 판단의 기준처럼 작용하던 ‘하늘’ 혹은 ‘천지의 도리’ 같은 개념이 상대적으로 약하다(129쪽).” 왜 그럴까. 이찬수 교수는 이 지점에서 다시 ‘천황제의 그늘’을 소환한다. 일본에서 천황제는 천년 넘게 존재했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던 걸 상상하기가 힘들다. 

결국 메이지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세계에서 ‘공’은 ‘멸사(滅私)’를 통해야만 가능해진다. ‘사’를 희생해야만 ‘공’을 구현할 수 있다. 오오야케와 와타쿠시에서 사실상 와타쿠시는 없다. 게다가 ‘멸사봉공’은 일본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덕목이다. 일본식 불교에서도 ‘멸사봉공’을 말한다. 화합[和]조차도 ‘멸사’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화(和)가 아니라 사실상 동(同)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정신세계 끝에는 침략전쟁과 카미카제, 할복과 옥쇄가 있을 뿐이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전쟁을 막지 못했던 것도 국가의 밖과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내부적 합의지점, 와타쿠시가 동의할 만한 최후의 오오야케가 천황 너머에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9쪽).”

이제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사’를 죽이고 ‘공’을 구현한 끝에는 천황이 남는다. 그렇다면, 천황은 주체인가 또다른 수동적 존재인가. 이 교수는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가 라디오연설로 밝힌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를 거론한다. 이 조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피해자 코스프레와 ‘내 책임은 없다’는 내로남불이다. 전쟁의 원인은 일본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 안정을 위해서였고, 종전의 이유는 일본 민족의 멸망과 일류의 문명파괴를 막기 위해서다. 전쟁에 졌다는 패전(敗戰)도 아니고 전쟁을 종결한다는 종전(終戰)이다. 결국 전쟁을 시작하고 끝낸 그 모든 게 ‘모두의 책임’이고 동시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렇게 천황은 유체이탈을 완성했다.   

메이지의 그늘은 곧 ‘평화헌법’의 딜레마로 이어진다. 이 교수는 “평화헌법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생존할 권리’를 비롯해 교전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조항 때문에 평화지향적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서 “하지만 그 모든 게 패전의 증거물이었고, 그러므로 일본 보수에게 평화헌법은 굴욕의 상징이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가 보기에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자위대를 군대로 전환하려 하고, 일본의 무력을 외부로 확장하려 하는 일본 보수정치 뿌리에는 메이지 시대 이후 시대정신이 돼 버린 ‘멸사봉공’, 그것이 누적시킨 ‘무책임 정치’가 똬리를 틀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천황을 비롯해 전쟁에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식 ‘무책임 정치’로 이어진 셈입니다.”

첫번째 강좌 <일본 메이지의 그늘, '제사하는 국가'와 '천황교'>는 여기를 참조. 


제사와 사회, 종교와 국가

메이지유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체제는 어떻게 일본에서 국민의 동의를 획득했을까. 이찬수 교수는 그 배경은 지극히 종교적이었다고 짚는다. “일본인의 오랜 위령 행위가 불교나 유교 혹은 신도의 모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 해야 옳겠다. 이것이 조상 제사를 강조해 온 천황제를 통해 강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0~81쪽).” 

사실 현대사회에서 대다수 국가는 제사를 사회화한다. 神의 자리는 이제 국가가 대신한다. 보훈과 호국영령숭배는 이제 사제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다. 신화 속 영웅들을 기념하는 공간은 신전이 아니라 전쟁기념관이나 국립묘지로 자리를 옮겼다. 신을 모시는 종교는 공(公)이 아니라 사(私)의 영역이 됐다.  일본 역시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사실 일본에서 정교분리는 한국보다도 더 확실하다. 정부부처에 ‘종무실’이란 조직을 두고 종교에 지원금 주고 종교가 지원금 받는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선 종교 단체에 정부예산을 지원한다는 제도 자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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