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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달이라는 혁신 혹은 환상

雜說

by betulo 2021. 10. 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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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이 온다’(麒麟が来る)라는 일본 드라마는 전국시대였던 16세기 중반에 처음 전래된 조총에 대한 꽤 흥미로운 시대상을 보여준다. 비싸고 복잡하고, 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니 전쟁으로 밥 먹고 사는 무사들은 “너구리 사냥할 때는 쓸모가 있으려나” 하며 조총에 시큰둥하다. 하지만 불과 한세대도 되기 전에 조총은 일본에서 전쟁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카게무샤’(影武者, かげむしゃ)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지휘하는 조총부대가 일제사격으로 적군을 궤멸시켜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배경이 된 나가시노 전투가 1575년 일이었다. 임진왜란 즈음에 이르면 일본군이 보유한 조총이 전 세계 조총의 절반가량이 됐을 정도라고 한다. 당시 일본군은 군사기술 혁신의 최첨단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아깝지 않을 듯하다.


 정말 충격적인 건 그 다음이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막부가 들어선 뒤 조총이라는 첨단무기는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개항과 근대화를 두고 혼란이 극심했던 19세기 주력 무기는 칼이었다. ‘바람의 검심’ 주인공들은 죄다 칼싸움만 한다. ‘레이더스’에서 칼 들고 덤비는 상대방을 권총 한 방으로 끝내버리는 다소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 들어설 틈이 없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총이란 손가락 움직일 힘만 있어도 쓸 수 있다. 그 말은 비천한 머슴이나 노예라도 고귀한 금수저 사무라이를 죽이는데 1초도 안 걸린다는 의미도 된다. 기술혁신이 기존 사회질서를 흔든다. 일본 에도막부는 기술발달보다 그냥 기득권 질서 수호를 선택해버렸다. ‘가케무샤’에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던 농민 출신 조총병들이 설 자리는 더이상 없다. 그 조총병들이 몰살시킨게 지배계급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8세기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추신구라’에서 사무라이 46명은 자신들이 모시던 영주의 복수를 위해 총이 아니라 칼을 들었다. ‘카게무샤’와 ‘추신구라’를 비교해보면 어느 영화가 더 앞선 시대를 다룬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여기를 참조). 그래서 나는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것처럼 흥분하는 분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기술진보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건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다. <전쟁교본>이라는 시집을 통해 전쟁과 파시즘으로 인한 절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브레히트는 1930년 무렵 당시 새로 등장한 신기술을 혁명의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고 한다. 그 신기술만 있으면 전 세계 각지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혁명의 대의를 전파할 수 있으니 혁명이 당장 눈앞에 온 것처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33년 브레히트는 그 신기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망명을 해야 했다. 이미 독일에선 정권을 장악한 나치가 그 신기술을 활용해 파시즘의 대의를 세계 각지에 퍼뜨리고 있었다. 그 신기술은 라디오였다.

 

 1990년대 초 이현세 작가가 그린 공상과학 만화 <황금의 꽃>을 떠올릴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잿빛 디스토피아를 다룬 그 만화에서 거대한 기득권층에 맞선 쿠데타를 일으키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딱 48시간만 버티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기득권층이 은폐한 진실을 모조리 폭로해서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쎄 세상이 그리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쿠데타가 실패한 뒤 저항을 꿈꾸는 이들이 모이는 해방구는, 인터넷이고 가상공간이었다. 만화 속 가상공간에선 아바타로 자신을 표현하며 토론하고 거짓이 아닌 진실된 정보를 공유하고 자유롭게 발언한다. 요즘 떠오르는 메타버스와 무척이나 닮았다. 2021년 현재 인터넷이야말로 저항과 해방의 공간이라고 한다면 공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10년쯤 전에는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나 UCC가 민주주의의 미래인양 떠드는 분들이 넘쳐났었다. 그리고 나서 1년도 안돼 우리가 목격한건 국정원 정규직들이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선거운동하는 꼬라지였다.

사진 출처 - pixabay


 기술? 중요하다. 기술혁신? 말해 뭐하랴. 기술은 전쟁의 문법을 바꾸고, 권력의 작동방식을 변화시키고 의사소통의 문법을 전복한다. 하지만 기술이 요술 램프는 아니다. 최첨단 기술 역시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공식·비공식 제도라는 제약 속에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기술에 취하다 보면 감염내과 전문의가 부족한 현실을 ‘감염내과 전문의를 확충하겠다’가 아니라 ‘감염내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이 전문의가 없는 병원과 디지털로 협진하겠다’는 한국판 뉴딜이라는 블랙코미디가 튀어나온다.


 기후위기가 화두다. 탄소 중립이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는 정책은 자꾸 기술발전을 통한 해법에 쏠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술발전 이전에 삶의 방식과 제도를 바꾸는 게 먼저 아닐까. 기술이 발전한들 사람들의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탄소 중립이 가당키나 할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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