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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낀 세대”가 “손해 보는 세대”에게

by betulo 2021.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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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는다는 건 뭔가 덜 행복해지고 더 기운 없어지는 것과 비슷한말처럼 느껴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이가 들수록 더 고집스러워지고 바뀐 현실에 덜 귀 기울이는 이를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늙은이는 곧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도 옛날 논농사 짓던 시절에나 통하던 얘기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자주 든다. 오늘 만난 한 지인한테서 “아버지와 사이가 꽤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원래부터 가부장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나라에는 ‘어른’이라고 할만한 분들이 많지 않은 건 분명해 보인다. 문익환, 리영희, 김대중 같은 이들은 더이상 없다. 종족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영훈은 말할 것도 없고 김종인 같은 이들도 능력 있는 건 알겠는데 존경심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한편에선 사회원로라는 말 자체도 인플레이션이다. ‘이코노미조선’이 올해 신년기획으로 사회원로 7명의 조언을 들었다. 등장인물들이 총리나 장관 등 한 자리씩 차지하며 한때 잘나갔던 분들인 건 알겠는데 나이 많은 것 말고 뭔가 사람을 잡아끄는 연륜이라고 할 수 있는게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김도연이라는 분처럼 특별교부세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물건인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자리를 걸고 국민들에게 알려주신 게 업적이라면 업적인 분도 있겠다.

 "나 때는 말이야”는 말은 농담이나 단순한 경험담으로는 들어줄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만 궁서체 느낌이 나는 순간 듣는 것 자체가 곤욕이다. 50~60년대생은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려고 해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고, 게다가 극장 구경도 제대로 못 해본 사람이 태반이었던 후진국에서 자랐다. 반대로 80~90년대생은 성장기에도 선진국 문턱이었고 지금은 말 그대로 선진국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누는 건 평생 벼농사를 지은 중국 농민과 평생 말을 키운 몽골 유목민이 각자 자기나라 말로 대화하는 것만큼이나 아득하게 먼 느낌일 것이다. 

하긴 1970년대에는 공무원들이 해외 우수사례 견학하러 필리핀으로 갔고 2021년에는 해외 각국 고위공무원들이 한국으로 견학을 오는 마당이니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대화를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신기한 해외여행 얘기도 아닌 바에야 ‘라떼’ 시리즈를 교훈으로 쓰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일 테니까.

 그렇다고 나이 든 사람은 그냥 조용히 입 닥치고 지낼 일도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가 될 수도 있겠다. 연륜은 언제나 힘이 있다. 통찰력과 선견지명으로 오래 잘 묵힌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만큼이나 사람을 잡아끄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분들과 얘기하다 보면 ‘나 때는 말이야’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보여주는 방대한 데이터 저장소 같다. 그리고 이런 데이터가 내 부실한 뇌세포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는 건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영화 ‘인턴’은 그런 모습을 꽤나 실감 나게 묘사했던 걸로 기억한다. 전화번호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다 정년퇴직한 70세 노인이 하필이면 그 전화번호부 회사가 있던 사무실에 입주한 온라인 여성 의류 판매 기업에 인턴으로 입사한다. 남들이 노트북을 켜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일할 때 007가방처럼 생긴, 하여간 오래된 가방에서 전자계산기 같은 오래된 물건을 꺼낸다. 

 

주인공 벤이 ‘나때는 말이야’라면서 정장과 가방 얘길 했다면 회사 직원들은 그저 70년을 살았으니 이제 자기들 눈앞에서 빨리 사라져주면 좋을 사람으로만 여겼을 것 같다. 하지만 벤이 풍부한 경험과 연륜으로 동료들과 어울리고 헌신적이고도 사려깊은 자세로 경영자의 신뢰를 얻자 그의 오래된 물건들은 ‘클래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정장 복장은 믿음직한 사람의 표식처럼 비친다. ‘경험이란 결코 늙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요새 젊은것들’ 소리가 조선시대와 고대 그리스, 심지어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적혀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사실 세상 모든 젊은이들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느끼고, 윗세대와는 다른 좀 더 진화한 생명체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특히나 ‘저런 꼰대와 우린 다르다’는, 구별을 짓고 싶은 마음은 이러저러한 세대론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게다가 나이가 곧 계급이고 신분인 한국 문화에선 나이로 사람들을 구별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기도 하겠다.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모던보이' 이광수도 공자왈 맹자왈 하던 윗세대와 신학문을 배운 자기 세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대라고 강조했다고 하고, 해방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심지어 지금 40대도 한때는 ‘새 세대’라며 언론의 주목을 한껏 받았다.

 자신들이야말로 ‘낀 세대’이고 그 때문에 윗세대보다 손해를 더 본다고 인식하는 것도 오랜 역사가 있다. 1993년 한겨레, 1995년 동아일보, 1997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30대를 ‘감각적인 신세대와 옛 세대 사이에 낀, 활자와 비디오 사이에 낀 세대’로 묘사하는데 당시 “샌드위치 세대”라는 30대가 바로 지금은 꼰대의 대표주자처럼 놀림받는 50대다. 지금은 이들을 586이라고도 부르지만 원래 이름조차 30대라는 걸 강조하는 '386세대'였다.

1997년 동아일보에는 “이기적이고 타인과 현실정치에는 무관심한 신세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한때는 X세대로도 불리던 그 신세대가 지금은 가장 정치참여에 적극적이라는 40대다. 2005년 경향신문과 노컷뉴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면 ‘효를 하는 마지막 세대’라며 당시 50대를 낀 세대로 표현하는데 이들이 지금은 60대다. 2005년 동아일보에는 58년 개띠를 낀 세대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이쯤 되면 ‘끼여서 손해 보는 세대’가 아닌 세대가 고대 이집트 이래로 한 번이라도 있었나 싶어진다.(더 자세한 내용은 초록불의 잡학사전 블로그 참조)

 요즘 MZ세대 얘기가 한참이다. 세대론이란 언제나 뭔가 새로운, 그래서 이러니저러니 갖다 붙이기 좋은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세대론을 확산시키고 이러저러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건 언제나 세대론을 통해 ‘옛 세대’로 규정되는 세대라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386세대”도 그랬고 “X세대” "Y세대" "Z세대" 시리즈도 그랬다. ‘모래시계 세대’니 ‘미생 세대’니 하며 각종 세대론이 쉴 틈 없이 유행가 가사처럼 이어지는 모양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정체불명인 “새정치”가 울고 갈 정도다. 과연 요즘 한참 잘나가는 ‘MZ세대 담론’은 과거와 얼마나 다를까.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발화점: 신진욱, 2021/04/27. <세대로 우리를 가두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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