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항상 역사책을 읽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연초에 세웠던 목표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특히나 실적이 부족해서 연말에 더욱더 맹렬하게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특별히 역사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읽는 속도가 가장 빠르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역사책을 읽는 것은 제게 '힐링' 그 자체입니다. (역사책은 소설책보다 재미있습니다.)
2016년을 마치고 보니 언제나처럼 한 해를 평가하게 됩니다. 어디보자... 2016년 한 해 동안 저는 책 50권 논문 46편을 읽었습니다. 월평균 4.2권과 3.8편을 읽었습니다. 2만 2165쪽이니 최근 9년 평균에 비춰서 2000쪽 넘게 적게 읽었습니다. 최근 9년 사이에 2010년과 2011년에 이어 가장 적게 읽었으니 반성할게 많은 한 해인듯 합니다.
내용면에선 더 좋지 않습니다. 12월에 5857쪽(19권)을 읽었습니다. 매우 맹렬하게 연말에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숫자에 집착하는 성과평가가 초래한 부작용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듯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2016년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고르는 건 해봐야겠지요. 2016년 저를 뒤흔든 12권을 선정해 봤습니다.
<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1984년>
<유라시아 역사기행>
<복지의 배신>
<대항해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
<뉴스의 시대>
<케인스 하이예크,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히로히토 평전>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한국 조세담론의 구조와 변동에 관한 연구>
12권을 읽은 순서대로 적어보니 역사책이 많기는 합니다. <신장의 역사>나 <유라시아 역사기행>은 세살버릇 여든 간다는 버릇을 확인시켜 주지 않나 싶습니다. <대항해시대>는 제가 이런 종류의 거대사를 좋아하는 취향을 반영하지요. <복지의 배신>과 <압록강은 다르게 흐른다>는 인류학 방법론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줬다는 점에서도 의미있었지만 각각 국가전략으로서 복지정책과 동북아시아 평화정책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하게 해줬습니다.
<1984년은> 저자 의도가 그랬듯이 미래(!)를 다룬 책으로 느껴져 섬뜩했다면 <뉴스의 시대>는 그런 시대를 막기 위해 꼭 필요한 언론의 역할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케인스 하이예크>는 20세기를 관통하는 경제정책 재정정책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다듬게 해준다면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는 '사실'에 입각한 해석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의 무인은 어떻게 싸웠을까>는 저자가 얼마나 피땀 흘려 공부했는지 책 구석구석에서 느껴져 제게 큰 감동을 줍니다. 빨리 읽히는 역사책 중에서도 이 책은 특히 더 재미있어서 출근길에 읽기 시작해서 퇴근해 집에 도착하니 벌써 거의 다 읽었을 정도입니다.
<히로히토 평전>과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는 일본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책일 뿐 아니라 근대 한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히로히토 평전>은 저자의 내공과 노력이 느껴져 저를 숙여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광수에 비판적이고, 저자 역시 그 굳이 이광수를 위해 억지를 늘어놓지 않습니다만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라는 책을 통해 이광수라는 인물의 행동거지가 갖는 역사적 맥락을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점은 다행입니다. 굳이 성토하지 않아도 굳이 찬송하지 않아도 깊이있는 기술을 통해 더 통찰력있는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가르침을 주는 책입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국 조세담론의 구조와 변동에 관한 연구>(가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제목이 '미디어담론에 나타난 세금폭탄 감세 증세 논쟁을 중심으로'인데 읽은 횟수로 치면 태어나서 가장 많이 읽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8월 이후 함흥차사가 된 게 다 이 놈 때문입니다. 바로 제가 쓴 박사학위논문입니다.
2014년 연초 무렵부터 본격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해 그 해 사전심사와 예비심사를 통과했고 2016년 연말에 드디어 본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심시 기간 동안 '내가 이러려고 대학원에 다녔나' 자괴감도 많이 들었고, 기타 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차마 밝히지 못하는 갖가지 감정을 많이 느꼈습니다만, 이제 통과도 되었고 하니 그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으로 남을 듯 합니다.
제가 멘토로 여기는 분이 제게 말하기를, 박사학위는 운전면허증과 같다고 합니다. 면허증이 있어도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 있고, 무면허여도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면허는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불법이지요. 면허증이 있으면 거북이운전을 하거나 과속운전을 하거나 교통법규만 어기지 않는다면 누구도 내가 운전하는 걸 문제삼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박사학위를 받은 제가 새 해 해보고 싶은 건 '도로주행을 많이 해서 운전실력을 늘리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