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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뒷얘기/시민의신문 기사

[친일재산환수] 해외사례 (2004.9.24)

by betulo 2007.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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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 재산몰수 원리원칙대로
[친일재산환수] 해외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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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9/24
강국진 globalngo@ngotimes.net

이세일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17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환수 특별법 공청회에서 발표한 ‘부역자 재산몰수 해외사례 연구’라는 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중국의 부역자 규정과 재산 몰수제도와 사례를 검토 분석했다. 그는 “보수적인 시각에 젖어 과거 일본의 법률 체계를 이어받은 일부 법학자들이 소급입법, 공소시효, 사유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환수에 관한 법을 반대하고 있다”며 “이들의 주장을 논박할 수 있는 부역자 처벌과 재산몰수에 관한 규정과 사례를 연구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이 발표한 해외사례를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주>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의와 자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유럽의 욕망은 세계대전 이전 정책실패에 대해 나치 부역자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쟁 전 유럽사회가 히틀러를 용인함으로써 떠안은 실패를 전쟁 동안 히틀러에 협력한 자들을 희생양으로 처단함으로써 실패한 과거와 인연을 끊을 수 있었던 셈이다.

 

사르트르가 지적한 것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 부역자들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점령군에 유화적인 감정을 가진 이유는 좌파가 집권하는 사태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2차대전이 터지기 직전 프랑스는 소련의 영향을 받는 좌파연합이 집권할 가능성이 있었다. 인민전선 집권 당시 수상이었던 블랑과 히틀러를 비교한 ‘블랑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는 슬로건도 횡행했다.

 

어느 나라든 부역자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가장 커다란 능력은 양다리 걸치는 기회주의이다. 라발같은 부역자의 경우 “1942년의 라발은 1940년의 라발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 것도 그런 특징 때문이다.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반역행위를 충분히 알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부역자들의 행위 동기보다는 행위 자체의 반역을 기준으로 정해야 한다.

 

나치점령 아래 있던 유럽 여러 나라들은 나치부역자를 사회에서 추방하려는 강력한 욕구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노르웨이에서는 독일군 병원에서 적십자 간호원으로 일한 모든 여성까지 유죄로 간주할 정도였다. 부역자로 고발당한 사람들의 집은 약탈당했고 그들의 소유물은 그 지방 전쟁희생자들에게 분배되었다.

 

벨기에의 경우 부역혐의자 약 8만명이 어떤 형태로든 처벌받았다. 4만8천명이 징역형을 받았는데 형량에 관계없이 벌금, 개인재산 몰수, 특정지역 거주제한 등이 뒤따랐다. 부역자가 가한 사회적 손실은 국가가 배상해야 했는데 필요한 경우 배우자나 상속자가 대납해야 했다. 이와 함께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특정 종류의 직업활동 금지도 규정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 전역이 동시에 해방되지도 않았고 비록 연합국이 드골 임시정부를 정통정권으로 인정했다 할지라도 승전국으로 나서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하루빨리 부역자 처리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에 따라 드골 임시정부는 부역행위 처벌에 관한 1944년 6월26일 명령, 프랑스 본토의 행정적 숙청에 관한 6월27일 명령, 문인․작가․작곡가․화가․조각가․판각사 숙청에 관한 1945년 5월30일 명령을 발포해 부역자에 대한 처벌규정을 명확히 했다.

 

1944년 6월26일 명령 제35조는 “재판소는 유죄판결을 받은 자의 재산의 전부나 일부에 대한 압류를 선고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히틀러 치하 비시정부 국무장관을 지냈던 페르디난드 드 브리뇽(작가)은 부역죄로 사형과 국적박탈,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언론인 귀 부나우 바릴라(르 마탱 발행인)도 종신형과 함께 전재산몰수형에 처해졌다.

 

프랑스 부역재판소에서만 1951년 1월31일까지 모두 6천7백63명의 부역자들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 가운데 7백67명이 처형됐다. 약 4만여명이 지역이나 금고형을 받거나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서는 부역자 숙청과 새로운 국가의 미래에 관해 많은 이들이 논쟁을 벌였다. 이 가운데 모리악과 까뮈가 사형선고를 받은 작가 부라지악을 놓고 벌인 사면논쟁은 유명하다. 논쟁의 핵심 주제는 미래를 이끌어갈 세대가 짊어져야 할 것이 무자비한 숙청에 따른 잔해이냐 아니면 타협을 통한 과거의 잔재이냐는 문제였다. 격렬한 토론 끝에 화해와 관용은 과거청산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상당수 부역자들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았다.

 

정리=강국진 기자 globalngo@ngotimes.net

2004년 9월 24일 오전 9시 6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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